바티칸에서 남북이 태권도 합동공연을 했더라면…

(가톨릭평화신문)
▲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5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을 하는 도중에 한국태권도시범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선수들을 격려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면서 귀중한 자료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북한태권도시범공연단의 선수 명단과 얼굴 사진입니다. 남녀 선수들 모두 얼마나 잘 생겼고 예쁜지, 지금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남북한태권도시범공연단이 2018년 5월 30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사이좋게 합동으로 태권도 시범 공연을 열기로 했었거든요. ‘태권도 월드컵’이라 할 수 있는 태권도 그랑프리 선수권 대회가 6월 1일 로마에서 개막될 예정이어서 이 행사 직전 수요일에 공연하기로 했습니다. 교황님은 매주 수요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 행사를 합니다. 넓은 광장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로 가득 찹니다. 일반 알현 행사 중간에 남북한이 태권도 시범 공연을 하기로 했으니, 그 자체로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불참 통보

일이 잘 성사되는가 싶었는데, 공연 직전 북한 측으로부터 불참 통보가 왔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허탈감이 밀려왔습니다. 공황 장애가 이런 것인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대북사업의 어려움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교황청, 이탈리아 정부 당국, 이탈리아 태권도협회 등 관계자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 ‘세기의 공연’을 준비했는데, 이메일 한 통으로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으니 허탈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은 공연 후 남북한 선수단을 관저에 초대하여 불고기 파티(한식 리셉션)를 하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젊은 운동선수들의 식욕이 얼마나 왕성하겠습니까. 무쇠도 녹일 나이지요. 선수들이 흡족히 먹을 정도로 쇠고기 등 식재료를 충분히 확보할 참이었습니다. 불고기를 즉석에서 구울 아르바이트생도 구해 놓았고, 케이터링 업체도 예약해놓았습니다. 그런데 행사가 취소되다니!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남한 팀 홀로 공연했습니다. 반쪽 공연이 되고 말았지요. 서랍 속의 자료와 사진은 당시 실무를 맡았던 이탈리아태권도협회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이날 반쪽 공연은 주교황청 대사 3년 동안 가장 큰 아쉬움을 남긴 사건입니다. 당시 한반도에는 평화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2월)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올림픽이 끝난 뒤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4월)이 열렸고, 뒤이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6월)이 열릴 예정이었지요. 저는 이 같은 남북미 간의 화해 분위기를 고려하여 주교황청 미국대사 부부를 리셉션에 특별 손님으로 초대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칼리스타 미국대사와 그녀의 부군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공화당)이 북한 선수단을 만나 격려해주면 이 또한 큰 화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때 미국 정계를 쥐락펴락했던 깅그리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0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나고 간 이후 교황청에서 ‘북한 붐’이 일었습니다. 교황님이 북한을 방문할 수도 있다는 뉴스가 터지면서 교황청 사제들은 물론이고 외교단의 대사들도 저를 만나면 북한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집요했고 깊이가 있었습니다. 언어, 종교, 권력 구조 등 세 가지에 집중되었습니다.



북한에 성당이 있나요?


먼저 언어입니다. 남북 정상이 통역 없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무척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남과 북이 정말 같은 말을 사용하나요?” “대사님도 북한 사람 만나면 통역 없이 말할 수 있나요?” 종교에 대한 질문은 더 집요하더군요. “북한에 진짜 성당이 있기는 하나요? 국가 홍보시설 아닌가요?” “가톨릭 신자가 얼마나 있나요?”

가장 예민한 질문은 북한의 권력구조였습니다. 사실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김여정이 누구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에 대한 관심입니다. 북한 특유의 정치 시스템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북한에 대한 이해는 높아졌습니다.

남한 선수단은 전원이 ‘La pace e piu preziosa del trionfo’(평화는 승리보다 소중합니다)라는 이탈리아어로 쓰인 대형 현수막을 펼쳤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이런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백만(요셉,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