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신앙살이] (561) 영원히 마르지 않을 눈물 (하)

(가톨릭신문)

추석 날 식사 초대를 받은 집에서,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어 할머니 손에 자랐던 형제님 가족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뭉클해지고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형제님의 아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나는 마음속 제주도의 풍경을 배경 삼아 듣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거의 매일 제주도에 계신 할머니께 편지를 썼대요. 그러면 손주의 편지를 받은 할머니는 동네 친구 할머니를 찾아가셨대요. 왜냐하면 할머니는 사실 글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는 글을 아는 할머니를 찾아가서 손주의 편지를 읽어 달라고 했었죠. 편지에는 할머니를 향한 손주의 사랑이 구구절절 쓰여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편지를 읽어주는 할머니는 그 편지를 읽다가 울고, 할머니는 손자가 쓴 편지 내용을 듣다가 울고. 그렇게 두 분은 편지를 읽으며 서로 부둥켜안고 우셨대요.”

“편지를 읽고 우시는 두 분 할머니의 모습이 그냥 느껴지네요.”

“남편은 대학 다닐 때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래서 돈을 모으자 제일 먼저 텔레비전을 샀대요. 그런 다음 당시 비행기 값이 비쌌기에 돈을 절약하려고 남편은 텔레비전을 들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에 가서,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이어 제주도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시골로 가서 할머니 집에 텔레비전을 설치해 드렸어요.”

“아니, 제주도에서 텔레비전을 사서 할머니께 가도 될 텐데.”

“남편이 이것저것 따져보니 그렇게 하는 게 좀 쌌던 거예요. 10원이라도 절약하며 지냈던 남편은 할머니 집엔 컬러 텔레비전을 놓아 드렸죠.”

“그런데 왜 텔레비전이었어요?”

“할머니께선 글을 모르시기에 혼자 집에 계실 때 심심해하지 마시라고 샀다네요. 할머니께서도 텔레비전에서 하는 말은 알아들으시니까 그렇게 해 한 거죠. 집에 컬러 텔레비전을 놓자 할머니께선 편지를 읽어주던 할머니를 당신 집으로 불러서 ‘이거, 우리 손주가 사다준 텔레비전’이라고 자랑하셨고, 두 분은 자주 함께 연속극도 보고 그러셨대요.”

식사를 다 마치고 사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그렇게 났습니다. 손자의 편지를 받고 친구 집으로 달려가는 할머니의 미소와 손자의 편지를 읽어주는 친구 분의 모습, 그리고 두 분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장면이 계속해서 가슴 속으로 울림이 되어 머물렀습니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영화나 드라마 같았습니다.

명절 날 저녁, 제주가 고향인 분들과 제주 음식을 먹으며 나눈 그 이야기는 내 마음 속 깊이 남았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제주도 산간 마을의 힘겨운 가난과 따스한 시골의 정서. 아들과 며느리가 일찍 죽자, 남겨진 손주 세 남매를 떠맡았던 그 할머니의 짙은 한숨 소리가 내 귓가에도 울렸습니다. ‘살아있으니 살아야지’하며 할머니는 손주들을 억척스럽게 키웠고, 손주들이 공부를 잘 하자, 당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뒷바라지를 한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당신은 10원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절약하시면서, 손주들은 넉넉하게 지원하며 훌륭하게 키우려고 했던 할머니의 거룩한 주름과 꾀죄죄한 얼굴. 그 속에 ‘한 맺힌 눈물 자국’이 묻어있는 흰 옷소매가 나의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또한 ‘할머니’라는 단어만 들어도, 몇 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는 형제님의 모습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눈물이 고여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 할머니. 이제는 살만한 형편이 되어 할머니를 편안한 집에 모시고 싶어 하지만, 그리고 아무리 사랑한다고 편지를 써 보지만…. 그 빈자리는 이제 눈물로만 채울 뿐이라는 형제님의 가느다란 목소리! 아마도 형제님은 하늘나라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날 때까지 평생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사랑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까지 눈물이 납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