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부활의 삶 사는 구세주는 지금도 존재

(가톨릭평화신문)
▲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받아들인 또 다른 구세주들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림은 아시시를 공격해 오는 이슬람 군인에게 성체를 들어보이며 수녀들을 보호해 달라고 클라라 성녀가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



12. 성녀 클라라의 거울 영성 하느님 현존 의식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관점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다른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긴 하지만, 앞서 나누었듯이 이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가는 과정일 뿐이다.

리처드 로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랑과 선, 그리고 거룩함은 모두 반사된 선물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존경심을 갖고 이 선물들을 바라봄으로써 이 모든 것을 갖게 되며, 이것이 사랑의 순환을 완성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창조된 세계가 여러분을 바라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은 모든 피조물의 외적인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방송매체나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 증오 범죄나 ‘묻지 마 폭력과 살인’과 같은 어이없고도 슬픈 사건들을 전에 없이 더 많이 마주하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주로 내 불행의 이유를 내 바깥쪽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사이코패스)’를 지닌 이들에게 매우 강하게 있는 정신구조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하느님의 시선이 아닌 ‘악’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정신세계는 자연스럽게 그런 악의 논리로 형성돼 간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우리 사회와 세상에는 이런 범죄나 미움보다 더 큰 사랑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훨씬 더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싶다. 그래야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또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시고 ‘참 좋다!’라고 말씀하신 곳으로서 회복해 갈 가능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건강하고 긍정적인 정신구조만이 하느님께서 더 건강한 세상, 즉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 선의 힘은 현시대의 문제보다 훨씬 더 크다. 이 둘은 비교나 대결 구도에 들 수도 없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요한 1,5)라는 복음서 저자의 선언은 이를 대변해준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번역해 놓았는데, 「200주년 신약성서」에 이 두 개의 번역이 다 가능하지만,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번역이 더 강한 표현이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에 비교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정확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정신구조를 지니고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우리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방향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가.

거울에 비추어진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 선하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방향을 잡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 반대로 방향을 잡은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분께서 혼합된 세상, 즉 인간성과 신성이 함께하는 세상이며 한 편으로 부서져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참으로 온전한 세상에 사시기 위해 지불하신 대가였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비록 세상이 늘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일관되지 않더라도 세상의 현실이 의미 없거나 어이없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당신 선의에 따라…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분을 머리로 삼아 한데 모으신다.”(에페 1,9-10 참조)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칸 그리스도론 전체를 요약해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십자가와 더불어 온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분은 십자가가 당신을 변모(부활)시키도록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내맡기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변모하고 부활하게끔, 우리도 그렇게 굳은 믿음 안에서 관계성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것을 당부하셨다.

그 당부는 다른 표현으로 하면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당신 삼위일체의 사랑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은 이런 당부와 절대 깨지지 않을 당신의 약속을 잘 드러내 준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분은 아버지께 대한 신뢰심 안에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끝없이 다른 어떤 곳(존재)에 투사하거나 그저 그 안에 갇혀 있는 세상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셨다. 이것이 바로 온전히 부활한 삶이고, 행복과 자유, 사랑의 길이며, 결국은 구원되는 길이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이런 부활의 삶을 받아들인 또 다른 구세주들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얼마 전 미얀마 미치나 지역에서 군부 세력의 폭력적인 시위대 진압 현장에 젊은 수녀 한 명이 몇 명의 군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상에 올라왔었다. 그 수녀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내 백성이 아니라 나를 죽이시오!” 이 수녀가 또 하나의 구세주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 사진과 기사를 보면서 필자는 클라라 성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클라라의 전기를 보면 이슬람 군인들이 산 다미아노 수도원으로 공격해 왔을 때 병중이었던 클라라 성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성체를 모신 작은 성광을 든 채 창가 쪽으로 가서 성체를 이슬람 군인들에게 보여주며 예수님께 “이 자매들은 당신의 자매들이니 이들을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이야기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