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위협과 두려움, 그러나 평화

(가톨릭신문)


“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입시 경쟁에 지쳐있던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소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던 때, 총원에 들어와 책임을 맡고 있는 현재까지도, 이 책을 만난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싸우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를 성경은 ‘평화’라고 표현합니다. 전쟁과 싸움은 무언가를 획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발생하는데, 이미 충분히 흡족한 상태에 있어서 더 무엇을 소유할 필요도 꼭 이기려는 마음도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연중 제14주일의 본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평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문은 선교와 사목의 궁극적 목적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한 것임을 표명하고 있고, 제1독서에서는 버려져 황폐해졌던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드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으며, 제2독서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결과가 평화와 자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 3주간의 복음들은 마치 3부작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연중 제12주일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소개되었다면 제13주일에는 그 소개된 분을 따르라고 촉구한 바 있으며 제14주인 이번 주일에는 이 부르심의 목적이 ‘파견’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다만 오늘 복음의 특이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12사도의 파견이 아니라 72제자의 파견을 묘사한다는 점인데(루카복음서에만 등장) 이는 본문이 집필될 당시 이민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루카복음서는 이미 9장에 12사도의 파견을 서술한 적이 있고,(9,1-6) 이어서 10장에 72제자의 파견을 배치합니다.(10,1-12) 12사도의 파견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면 72제자의 파견은 전 세계를 향한 것이고 이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하려는 루카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 보내심

선교의 대상: 제자들의 파견은 “모든 고을과 고장”(루카 10,1)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는 매우 큰 시사점을 전해줍니다. 중세와 근대 그리스도교가 선교에 대하여 가졌던 인식은, 주로 사제와 수도자들을 먼 곳으로 보내어 그곳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다 본질적으로 깨닫게 되는데, 선교의 대상은 멀리 있는 변방의 국가들이 아니라 도시와 가까운 마을, 내 주변의 사람들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바 있는 프랑스 교회는 선교를 명분으로 자행되었던 과거의 식민지 정책에서 돌아선다는 의미로, 프랑스야말로 우선적으로 선교되어야 할 땅임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복음화와 사목, 선교를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은 나 자신과 우리 가정, 우리 주변인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다음으로 본문은 진정한 사목과 선교가 적용해야 할 방법을 ‘수확’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가 무르익기까지 키우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72제자는 그저 열매를 거두어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교가 인간의 전략이나 치밀한 실행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주도하시고 구현하시는 사건임을 표명합니다. 그런데 이 ‘수확’을 위해 명심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3-4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 보호와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가야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없이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도직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므로, 인사하는 일에조차 깊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실 ‘사도’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는 ‘파견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사도직’은 ‘파견하신 분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도직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일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개인적 성실과 열성으로 최선을 다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와 열성에만 의지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 일’이지 ‘사도직’이 될 수 없습니다.

선교의 내용: 전해야 할 가르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9절) 왔음을 알리는 것이고 이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5절)라고 인사하라고 하시는데 이 인사는 ‘샬롬’이라는 전형적인 유다인들의 인사이며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평화는, 정치적 협상과 교섭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쟁 중지와는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이 주시는 사랑과 자비가 너무나 충만하고 흡족해서, 아무리 주변에서 싸움을 조장하고 딴지를 걸어 억울함과 불안, 분노를 유발시킨다하더라도 도무지 싸울 의지나 마음이 안 생기는 평정의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 예루살렘의 평화

복음화와 선교의 결과를 제1독서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신탁으로 제시합니다.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는 이들”(이사 66,10)에게 이제 구원된 기쁨의 상황이 ‘물’과 ‘모성’에 대한 은유로 선언되는데 “평화를 강물처럼, 평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인다는 표현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위로를 받으리라”(12-14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물’과 ‘어머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황폐해졌던 예루살렘에 이제 생명과 삶의 필수적 요소들이 공급됨으로써 평화와 구원의 도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 백성의 평화

제2독서는 바오로의 선교 전략을 소개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자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갈라 6,14) 구원과 은총은 매일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역설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교회의 사목과 선교는 “새로운 창조물”로 사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15절) 할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됨을 상징하는 전례적 행위였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분 짓고 남성을 여성과 구분 짓는 표식이었으나 이제 ‘새 창조’를 통해 하느님 백성이 됨은 더 이상 할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16절)라고 인사합니다. 새 창조의 열매는 하느님의 평화와 자비인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누구도 내편이 아니고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온전히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 지켜내야 할 존엄과 열정, 용기와 지혜 같은 것들입니다. 돈주머니나 보따리, 신발도 없이 맨몸으로 낯선 땅을 통과해 가야하지만 그 위협과 두려움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온전한 동행에 집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평화야말로 세상과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궁극적이며 강력한 힘입니다. 누구도 뺏을 수 없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진정한 평화를 사는 것,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복음화의 모습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