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사소함에 대한 행복(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가톨릭평화신문)


얼마 전 한 달 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한 달이라고 말할 때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두 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참으로 기특한 말이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다리와 머리도 다칠 수 있는 사고였는데, 허리만 다쳤을 뿐 다른 곳은 무사하기 때문에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가 이렇게 너그러운 인간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판 같아졌습니다. 이기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제가 너무 공손해져서 하느님도 웃으셨을 겁니다.

전 늘 비우고 또 비운다고 말했지만, 탐욕에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다시 제 마음을 개혁하라고 한 달 동안 누워있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개혁은 성공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돌이 된 아기가 되어 기는 것, 앉는 것, 서는 것, 걷는 일을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일흔일곱에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앉는 일, 서는 일, 걷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런 것쯤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 정도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왜 그것이 축복인지는 부끄럽지만,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걸으면서 푸른 하늘을 보는 일, 나무에 앉은 새를 보는 일, 걸으면서 참아내려는 울음같이 붉은 노을을 보는 일은 눈물겹도록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모두 주님이 무상으로 주신 선물이니까요.

괴테의 ‘행복의 다섯 가지 원칙’은 나를 실망하게 했었습니다. 적어도 괴테라면 철학적이고 더 명상적이어야 한다고 건방을 떨었지요. 첫째,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기. 둘째, 미워하지 않기. 셋째, 사소한 일에 화를 내지 않기. 넷째, 현재를 즐길 것. 다섯째, 내일은 신에게 맡길 것이었습니다. 나도 다 아는 일이라고 건방을 떨었는데 저는 늘 지난 일을 가지고 안절부절못하고, 남을 미워하고 화를 잘 내며, 내일을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지 않고, 이상이나 꿈이라는 이름으로 내일을 내 식으로 조각하곤 했습니다. 그 다섯 가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사소한 일을 행하는 자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소함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그 이름에 답하는 문호라는 것을 몸을 다치고 알았던 것입니다. 어리석음은 끝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지, 왜 묵주기도를 그치지 않는지 가슴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이 겸손이 얼마나 갈까요. 제 나이를 보면 이 정도는 깨달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설픈 몸이지만 그치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대화하는 이 무량의 시간이 황홀할 만큼 행복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나의 통증이여, 주님을 찬미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