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철의 평화칼럼] 먹히는 것들에 대한 예의

(가톨릭평화신문)


꿈틀대는 뭇 생명이 예외 없이 가련하다. 얼마 전 제주에서 퇴역 경주마가 인부에게 매를 맞고 도축 당하는 현장을 고발한 영상을 본 뒤 그 좋아하는 육류를 며칠 입에 대지 못했다. 부슬비 맞아가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인기척에 놀라 승용차 밑으로 숨어버린 길냥이가 애처롭다. 하다못해 살려고 줄행랑치는 작은 바퀴벌레 한 마리에도 연민을 느낀다.

이런 ‘증세’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는 탓일 게다. 요즘은 TV 채널을 돌리다가도 눈살을 찌푸릴 때가 많다. 여기도 먹방, 저기도 먹방이다. 유튜브 공간이라고 다르지 않다. 굽고 지지는 냄새가 진동한다. 우걱우걱 씹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끌벅적한 먹자골목이 따로 없다.

먹방을 보면서 마뜩잖은 것은 먹을거리를 대하는 출연자들의 태도다. 산 낙지 다리를 고무줄 끊듯 뚝 끊어 입에 넣으면서 저마다 배꼽을 잡고 웃는다. 토막 낸 황다랑어 대가리를 탈바가지인 양 머리에 뒤집어쓰고 카메라 앞에서 장난을 친다. 또 치킨 조각들을 어린애 장난감 굴리듯 갖고 논다. 그들에게 먹는 행위는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먹방이 시청자들에게 잘 먹히는가 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처연해진다.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 내 몸 안에 넣는 행위는 놀이가 될 수 없다.

먹고 마시는 행위와 그 즐거움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무릇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산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다른 생명체를 입에 넣고 씹어 삼키지 않으면 죽는다. 인간이 태곳적부터 사냥을 하고, 지금 빌딩 숲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건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다. 먹는 행위는 생명의 근원적 조건이다. 허나 사람들은 먹히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잊고 있다.

아메리카 평원의 인디언 블랙풋족에 ‘들소 폭포’ 신화가 있다. 인간에게 잡혀먹혀야 하는 운명인 들소가 환생을 바라며 부족 처녀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신화에 등장한다. 그래서 그 부족은 해마다 들소 춤 의식을 거행했다. 인간에게 기꺼이 밥이 되어준 희생 제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생겨날 수 없는 신화다. 그들은 적어도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했다. 들소 춤은 동등한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죄의식과 딜레마에서 고안됐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종교는 식탁에서 기도를 바친다. 가톨릭 신자들은 식사가 끝나면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한다. 하느님께서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창세 1,29)를 양식으로 내려주신 데 대한 감사이다. 여기서 감사하는 마음은 밥 한 공기에 들어있는 땅의 자비, 태양과 바람과 비, 농부의 수고에까지 미친다. 또한 희생되어 우리에게 양식이 되어준 생명체에까지 가 닿아야 한다.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된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제주 경주마는 머리와 등을 막대기로 맞아가며 도축장에 끌려 들어가 다른 말들이 보는 앞에서 도축됐다. 그 말고기는 제주 특산품 딱지를 붙이고 마트 매장에 나왔을 게다. 야만과 학대의 피가 묻은 고기가 인간의 몸에 좋을 리 없다. 아울러 예능 배우가 먹은 낙지 다리는 먹을거리가 아니다. 그저 장난감이다.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먹으면 안 된다. 접시에 놓인 고기 한 점을 대하는 태도가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 그 태도가 나의 인성과 의식을 형성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입에 넣고, 공손하게 삼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