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규 수녀의 사랑의 발걸음] 24. 누가 우리를 갈라놓겠습니까

(가톨릭평화신문)


프랑스의 우리 베르사유 수녀원은 5개국의 국적을 가진 수녀님 11명이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고 있다. 우리 수녀회도 작은 지구처럼 다양한 국적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카메룬 출신 마리 수녀님은 잘 웃는 분이시다. 그것도 방긋 미소 짓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동료 수녀가 유머 섞인 이야기를 하면 목청껏 “하하”, “호호” 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전혀 망설이지 않고 모두 표현하신다. 그럴 때마다 수녀원은 시끌시끌하고 요란스러워질 때도 있지만, 우리는 덩달아 함께 손바닥도 쳐 가며 한바탕 크게 웃는 계기가 된다. 그러고 나면 나도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마리 수녀님에게 붙인 ‘애칭’은 공동생활 안에 웃음과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뜻을 담아 ‘발동기 수녀님’이라 붙였다. 한 번은 점심 후 모든 수녀님과 즐거운 휴식 시간을 가질 때였다. 마리 수녀님이 아프리카인의 검은 피부색의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게 됐다. 마리 수녀님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나는 수녀님이 자신의 피부색에 일종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이내 나는 언젠가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용은 이렇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흙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 불 속에 넣어 익히는 동안 산책하러 나가셨다. 그런데 자연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만 불에 익히고 있던 인간을 꺼내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신 것이다. 하느님은 얼른 뛰어가셔서 불 뚜껑을 열었는데, 아뿔싸 새까맣게 타버린 것이 아닌가! 이렇게 너무 익어버린 ‘인간’이 아프리카인의 원조라는 뜻에서다. 다음 차례가 되었다. 하느님께서 이번엔 흙 인간을 불 속에 넣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산책하러 안 나가시고 불문 앞에서 조마조마해 하시면서 기다리셨다. 그러다 불문을 열어보시니 아이고 어쩌나 덜 익어서 흰색이었다고 한다. 백인의 원조다. 마지막 세 번째에는 하느님께서도 긴장되셨다. 정성스럽게 흙으로 다시 만든 인간을 불 속에 넣으시고, 이번에는 정말 내가 원하는 색의 인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시면서 신중하게 기다리셨다. 적당한 시간이 되었을 때 미소를 지으시며 불문을 가볍게 열어보시었다. 하느님께서는 손뼉을 치시며 바라본 인간은 더 익지도, 덜 익지도 않은 노릇노릇한 황색 빛이 나왔다. 이 사람이 황인의 원조다.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전하자마자 수녀원 식당은 순식간에 수녀님들의 폭포 소리 같은 웃음보로 뒤덮였다. 함께 즐기기 위해 꺼낸 이 익살이 우리가 배를 쥐고 웃어야 할 만큼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화가 되었다. 여러 나라의 수녀들이 함께 살기에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큰 복이다. 아프리카 수녀 마리는 나를 바라보며 차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나도 눈웃음을 보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로마인들에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하고 질문을 던졌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환난도 아니고, 박해도 아니며, 굶주림도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 우리는 피부색과 언어, 문화의 차이를 넘어 예수님 사랑 안에 서로 아끼며 영적 투쟁 속에도 꿋꿋하고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프랑스 성요한 사도 수녀회 장현규(마리스텔라)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