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수도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단일 대교구이며, 오랫동안 트리어대교구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70년 교구로, 1988년 대교구로 승격됐고, 2019년 룩셈부르크 교회 역사상 최초로 추기경을 배출했다. 출처=shutterstock
오늘 소개할 곳은 수도와 나라 이름이 같은 룩셈부르크의 순례지입니다. 룩셈부르크는 963년 지크프리트 백작이 루실린부르후크(Lucilinburhuc) 요새를 건설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작은 성’이란 뜻의 이름처럼 우리나라 서울과 주변 도시를 합친 크기의 작은 나라로, 수도만 둘러봐도 이 나라 정수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현재 68만 명 조금 넘는 인구의 약 47%가 외국인인 국제적이면서도 조그만 국가입니다.
하지만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수도가 암벽을 끼고 요새로 건설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런 단점이 장점이 되어 유럽연합(EU)과 국제기구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웃 국가인 벨기에·프랑스·독일 국경에서 한 시간이면 수도에 닿을 수 있어서 저도 독일 트리어에 갈 때면 곧잘 들르곤 했습니다.
룩셈부르크 노트르담 대성당 서쪽 정면. 원래 예수회 학교 성당으로 왼쪽 건물이 예수회 학교였다. 1773년에 예수회가 폐쇄된 후 국립 대학이 관리하다가, 1778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시에 기증했다. 1935년~1938년 대성당 남쪽 면에 익랑·가대석·지하 성당을 증축했다.
개혁을 위해 룩셈부르크에 진출한 예수회
이 지역에 트리어에서 복음이 처음 전해진 건 4세기경이었습니다. 성 빌리브로르도가 690년대 말 트리어 인근에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설립해 룩셈부르크 선교에 전적으로 나서면서 신앙이 뿌리내립니다.
나라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신앙은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매우 격화되면서 룩셈부르크 지역도 풍전등화였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알브레히트 7세 대공과 아내는 신교에 맞설 구원투수로 예수회를 룩셈부르크로 초청합니다.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교리를 정립하며 신교에 적극 맞섰는데, 이 과정에서 예수회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우리나라 서강대학교처럼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 특히 학교 설립으로 신학 교육 강화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재확립하고 가톨릭 전통을 수호하고 계승하는 데 앞장섰지요. 현재 룩셈부르크 가톨릭교회는 교황청 직속으로 단일 대교구입니다만, 당시 룩셈부르크는 트리어대교구에 속한 일개 본당에 지나지 않아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1603년 예수회는 룩셈부르크에 최초로 정착해 1613년부터 1621년 사이 예수회 학교 성당을 세웠는데, 이 성당이 룩셈부르크 사람들의 성모 신심의 중심지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번 순례의 목적지인 룩셈부르크 주교좌 성당인 노트르담 대성당이지요.
중앙역에서 대성당으로 가는 길은 룩셈부르크의 구시가지를 통과합니다. 번화가를 지나면, 계곡을 낀 룩셈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다리 우측으로 16세기 플랑드르 르네상스 양식의 대공궁을 비롯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코니라고 불리는 코르니슈 산책로가 보입니다. 저 멀리 과거 역사와 전쟁의 상흔이 묻어나는 보크 요새도 보입니다. 다시 걸음을 이어 나가면 신시가지 초입에 후기고딕 양식의 노트르담 대성당 두 첨탑이 나타납니다.
대성당 주 제대.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모 마리아와 룩셈부르크에서 특별히 존경받는 성인들을 주제로 제작했고, 가대 아래 지하 성당에는 룩셈부르크 주교들과 대공 가문의 무덤이 있다.
성모 팔일 축제 400주년 행렬(위)과 축제 시장(아래), 프란치스코 교황의 400주년 선물인 황금 로사리오(오른쪽). 성모 팔일 축제는 룩셈부르크 대공 가족 이하 정부·공공기관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국가 행사다. 이름과 달리 16일간 진행되며, 마지막 날에는 성모자상을 모시고 시가를 행진한다. 축제 기간에 17세기부터 순례자들에게 음식과 생필품을 제공하기 위해 시작된 축제 시장인 마에르첸이 열린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신 성모님을 위한 축제
룩셈부르크 대성당에 들어서면 아담하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후기 고딕 양식의 높은 천장과 아치형 창문, 르네상스 양식의 입구 조각상, 이탈리아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 등 다양한 양식을 조화롭게 담아냈습니다. 성당 안의 19·20세기에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에선 성모 마리아와 룩셈부르크 신자들이 공경하는 성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가대석 뒤편에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자상’이 있습니다.
성당이 세워질 무렵 유럽에는 30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에 있었지만,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주변 강대국들의 영토 분쟁과 군사 충돌로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사람들을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빈번한 전염병 창궐이었습니다. 1620년대 초부터 페스트가 유럽 곳곳을 휩쓸었고, 이 시기 룩셈부르크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는데, 특히 어린이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성모자상.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 성모상이라고도 불린다. 느릅나무 재질의 약 73cm 크기 성모자상으로 중세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관습에 따라, 조각상은 화려하게 수놓은 긴 망토를 입고 있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 글라시스 소성당에 모셨고, 팔일 축제 기간에는 순례자를 위해 예수회 학교 성당에 모셨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예수회 자크 브로크카르 신부는 성모님의 은총과 보호를 청하며 성모자상을 제작합니다. 1624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학생들이 이 성모자상을 모시고 도시를 행진하며 성모님의 보호를 청했습니다. 이후로 기적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브로크카르 신부가 성모님의 도움으로 페스트에서 치유되고,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나며, 갑작스럽게 홍수가 나서 성벽을 폭파하려는 적의 계획이 무산되는 일이 벌어졌지요.
1625년~1628년 성벽 바깥에 글라시스 소성당을 세우고 성모자상을 모십니다. 이때부터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을 찾는 순례가 시작됩니다. 또 부활 제3주일부터 제5주일까지 성모님께 감사하고 전구를 청하는 ‘성모 팔일 축제’도 시작됐는데,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로 자리 잡습니다.
1666년 5월 10일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를 룩셈부르크 도시, 1678년엔 2월 20일에는 룩셈부르크 공국의 수호성인으로 삼습니다.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은 팔일 축제 기간에 최초로 전대사를 베풀었지요. 1796년에 프랑스 혁명군에게 소성당이 파괴된 후 성모자상은 대성당으로 옮겨 지금까지 이곳에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때 가톨릭 신자가 97%에 달했던 룩셈부르크 신자 비율은 절반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성모 팔일 축제만큼은 신앙을 갖지 않은 시민들도 전통적 국가 행사로 여겨 관심이 높습니다. 성모 팔일 축제 마지막 날에는 수천 명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글라시스 소성당까지 거리 행진을 하지요. 성모님이 한 나라의 구심점으로 신앙의 지지대가 되고 있다는 것, 선교 지역 국가로서는 부러운 일입니다.
<순례 팁>
※ 프랑스 메스·독일 트리어에서 자동차로 50분, 열차로 1시간 남짓 거리다.
※ 노트르담 대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 10:30·12:00·18:00, 평일 12:15(월~금), 09:00·17:00(토). 시간별로 프랑스어·독일어·룩셈부르크어로 봉헌한다. 성모 축제 기간 중 처음 성모자상을 모셨던 글라시스 소성당(Chapelle du Glacis)에서도 성체조배가 있다.(월~금 13:00~14:00) 대성당에서 도보로 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