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빼앗기고 외롭게 버려진 정조와 사도세자 장조의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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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화성 건릉 정자각’, 유리건판, 1911년 4월 2일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정조 때 조선에 가톨릭 신앙 들어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25세 나이에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한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내린 첫 교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던 정조가 임금이 되자마자 오랜 세월 응어리진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을 이젠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포였다. 그는 왕권을 키우기 위해 인재를 양성했고, 문화를 장려해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웠다. 가톨릭 신앙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정조 때였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관심이 깊었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와 일행은 1911년 4월 2일 조선의 위대한 군주로 손꼽히는 정조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찾았다. 건릉(健陵)과 융릉(隆陵)이다.

건릉은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 능이고, 융릉은 ‘사도세자’로 더 잘 알려진 정조의 아버지 장조와 부인 혜경궁 홍씨 곧 헌경왕후의 합장 능이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정조 이후 기울어진 국운을 회복하려는 뜻에서 장조부터 조선 왕조를 다시 수립한다는 의미로 이들을 ‘황제와 황후’로 추존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천주교인 박해

융·건릉은 화성 팔경 중 제1경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이다. 화성은 정조가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세운 성이자 고을이다. 기품있는 소나무와 단아한 참나무 숲길에 들어서면 곧장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에 건릉이, 오른편에 융릉이 있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먼저 건릉으로 향했다.

1800년 음력 6월 28일 정조가 49세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그가 죽은 지 5일 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올랐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1801년 천주교인들을 박해했다. 바로 신유박해다.

정순왕후와 사도세자를 죽인 벽파 무리는 정조를 융릉 동편 옛 수원부 강무당 터 흉지에 묻었다. 이후 1821년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가 서거하자 융릉 서편 향교 터로 천장(遷葬), 정조와 효의황우를 합장해 건릉을 조성했다.

능지기가 베버 총아빠스 일행을 먼저 ‘건릉 정자각’으로 안내했다.<사진 1>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봉분 앞에 ‘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이다. 정자각 좌우로는 제례를 준비하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있다. “정자각은 비어 있었다. (?) 정자각은 선왕의 위패를 모셔 두고 해마다 제사를 봉행하는 곳이다. 향로가 제삿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상에는 밥과 술과 더불어 향로도 올린다. (?) 어두운 기와지붕을 떠받치는 서까래는 전부 엷은 푸른 바탕에 붉고 흰 단청으로 치장되었다. 청동 잡상들은 용마루 위에 웅크리고 앉아 수백 년 동안 파손 위기를 견뎌내었지만, 잡귀를 쫓으려고 기와지붕 위에 어렵사리 올려 둔 단철 사슬들은 녹슬어 가고 있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244쪽)

능은 그 자체로 조선 임금의 권위를 드러내기 충분하다. 건릉은 봉분의 흙과 사초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병풍석을 대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하지만 융릉과 달리 문·무인석과 석수 등 왕릉 형식에 맞게 봉분 주변 석물을 세웠다.<사진 2>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화성 건릉’, 유리건판, 1911년 4월 2일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정조, 아버지 장조의 묘 옮기고 자주 참배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 장조의 묘를 배봉산에서 천장한 후 융릉을 자주 참배했다. 정조는 융릉을 옮긴 후 12차례나 화성행궁을 했다. 풍수에 능했던 그는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융릉 주변 산을 둘러보며 자신의 묫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건릉의 또 다른 주인은 효의왕후 김씨다. 김시묵의 딸로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안타깝게도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효의왕후는 육십이 넘어서도 정순왕후와 헌경왕후를 모셨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어서도 존호를 사양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나라가 망한 후 외롭게 버려진 왕릉을 보면서 자신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먹먹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서 능지기를 “그가 지키는 무덤처럼 숲 속에서 잊히고 버려진 존재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런 감정이 컸던지 베버 총아빠스는 건릉에서 직선 거리로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융릉에는 가지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한국 사진 아카이브에는 1911년에 촬영한 융릉 사진이 보관돼 있다. 아마도 동행했던 카니시오 퀴겔겐 신부가 촬영하지 않았나 싶다. 그의 사진 다수가 베버 총아빠스의 1911년 조선 여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융릉의 사진이 베버 총아빠스의 사진적 시각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구도를 제대로 잡지 않고 급하게 찍은 게 역력하다. 베버 총아빠스는 풍경에 인물을 넣어 촬영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융릉 사진에는 주제인 능조차 없고 문·무인석만 촬영돼 있다. 아마도 퀴겔겐 신부가 급하게 뛰어가 잽싸게 석물만 찍고 일행에 합류한 모양이다.<사진 3>

화성 융릉은 세종의 영릉 다음으로 명당이다. 정조는 비극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가 천하의 명당에서 안식을 누리길 원했다. 그래서 풍수에 능했던 남인 출신 윤선도가 효종의 영릉으로 추천했던 화산 수원부 객사 뒷산에 융릉을 조성했다. 윤선도는 ‘화산은 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으로 용·혈·지질·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워 천 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라고 했다. 정조는 융릉 천장을 시작으로 화성을 축조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후 대성통곡했다.
<사진 3> 작가 미상, ‘화성 융릉’, 유리건판, 1911년 4월 2일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융릉 문·무인석, 조선 왕릉 대표하는 석물

융릉의 문·무인석은 영조가 조성한 인조 장릉의 석물과 함께 조선 왕릉을 대표하는 석물로 꼽힌다. 아마도 이 문·무인석이 너무 빼어나 융릉에서 이 석물만 중점적으로 촬영한 듯하다.

융릉의 또 다른 주인은 헌경왕후 곧 혜경궁 홍씨다. 그는 남편 장조의 참변을 소재로 한 자전 수필 「한중록」을 저술했다. 아들 정조마저 죽고 순조가 임금이 된 후 왕실 어른으로 조용히 생활하다 81세 나이로 서거했다.

복자 강완숙(골룸바)이 헌경왕후의 7촌 서질부이다. 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의 처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신유박해 때 강완숙과 함께 순교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초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방문하면서 조선 천주교회사를 간략하게 기술했다. 그중 정조 말기와 신유박해 초기 부분을 이렇게 서술한다. “작고 미약하게 출발한 조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4000명으로 불어나자, 1791년 잔불 속에 숨어 있던 증오의 불씨에서 돌연 첫 번째 박해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죽었다. 사제도 없이 신앙을 다져온 이 가련한 사람들이, 친지들의 눈물과 탄식으로 마음이 약해졌다 한들 그게 어디 놀랄 일이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웅들은 조선의 야만적 관례에 흔히 있는 고문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그 믿음 하나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0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