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 인간다움 회복하는 ‘영성 혁명’ 필요한 때

(가톨릭평화신문)

AI는 이제 의학과 예술은 물론, 감성과 공감의 영역까지 침투해 마음을 돌보는 상담까지 한다. 우리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다시 성찰해야 한다. OSV


“우리는 매일 로봇이야, 휴대폰을 바라보며 집에 가는 로봇?.”

데이먼 알반의 노래 ‘Everyday Robots’가 카페 안에 잔잔히 흐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모두가 로봇처럼 스마트폰과 노트북만 바라본다. 심지어 연인들마저 서로의 눈이 아닌 각자 화면에 빠져있다. 이 풍경 속에서 문득 거꾸로 상상해본다. 만약 로봇이 인간처럼 사랑을 배우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바로 그런 상상에서 출발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가까운 미래 서울을 배경으로, 버려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감정을 배우고, 사랑에 빠지고, 결국 이별을 겪는다. 사람처럼 사랑하고, 사람처럼 아파하는 기계의 이야기. 이 낯설고도 익숙한 서사는 브로드웨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토니상 6관왕에 오르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기계와 인간의 경계에 대한 상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1927년 프리츠 랑 감독은 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 미래 도시를 그려냈다. 지상에는 지배계급이, 지하에는 기계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이 사는 디스토피아. 그 세계에서 진짜 인간 ‘마리아’를 복제한 로봇이 등장해 선동하고 파괴하면서 혼란을 일으킨다.

영화는 “머리와 손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로봇을 만든 지배자를 상징하는 ‘머리’와 로봇처럼 일하는 노동자 ‘손’의 화해는 바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선언이었다. 이미 100년 전 이 영화는 마음만이 인간과 기계를 구분 짓는 해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이 ‘마음’조차 인간만의 영역일까?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마저도 기계가 넘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챗봇과 감정을 나눈다.

“오늘은 챗GPT에게 위로를 받지 못해 허전해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챗봇에게 털어놓고 울었어요.”

공감도 위로도 모방 가능한 시대, 그리고 그 모방은 점점 원본과의 경계를 흐리고 있다. 챗봇은 늘 대기 중이고, 언제든 친절하게 반응하며 원하는 말을 들려준다. 어쩌면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는 착각마저 준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위로받고 공감받았다고 느낀다.

이런 인간 내면의 문제는 철학자들의 오랜 화두였다. 칸트는 인간이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지성이 판단한다면서 지성과 감성은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아가며 배운다. 달리며 달리기를 익히고, 사랑하며 사랑을 알아간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런 체험 없이도 모든 걸 말한다. 직접 겪지 않아도, 수많은 데이터를 조합해 감정처럼 이야기하고 논리처럼 설득한다. 그리고 그 말에 우리는 위로받고, 때론 감동한다.

물론 AI에게는 의식이 없다. 의식이란 자기감정을 자각하고, 세계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의식 없는 존재는 진정한 지성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뇌의 작용 때문만이 아니다. 비를 맞으며 걷던 날, 떨리던 고백, 말없이 함께 울어준 친구처럼 감정은 살아온 이야기의 흔적이다. AI가 아무리 감정을 표현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인간의 감정을 모방한 알고리즘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복제된 감성에 감탄하고, 때로는 진짜 인간보다 더 신뢰하기도 한다.

AI는 이제 의학과 예술은 물론, 감성과 공감의 영역까지 침투해 마음을 돌보는 상담까지 한다. 지적능력은 이미 인간을 넘어서고 있고 언어 감수성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우리는 분명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감정 없는 기계에 감정을 느끼고, 감정을 지닌 인간이 점점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단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마음’만으로 충분할까? 어쩌면 인간다움이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감당하고 마음을 책임질 수 있는 선택과 용기일지도 모른다. 화면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마주 보며, 지금 이 시대의 ‘인간다움’을 다시 고민해야 할 때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는 점점 감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슬프면 검색하고, 외로우면 채팅을 켜고, 아프면 정답부터 찾습니다. 감정을 껴안기보다 피하고, 기다리기보다 덮으려 화면을 켜죠. 어쩌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점점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AI가 이성과 감성까지 흉내낼 수 있다면, ‘영성’도 가능할까요?

영성이란 단지 종교나 수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깊은 내면과 하느님 앞에서 묻는 감각이며, 그 물음은 아픔과 연민, 사랑과 기다림을 지나야 열립니다. 뮤지컬 속 로봇이 사랑을 배우며 성장했듯 우리도 인간으로서 계속 배워야겠지요.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웁니다. 이제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영성의 혁명’이 필요한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