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부추기는 과도한 탐욕 경계해야 건강한 삶

(가톨릭평화신문)
끊임없이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스로를 닦달하는 현대사회를 욕망의 과잉시대라고 불러도 전혀 과하지 않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1959~ )은 현대사회를 ‘긍정성의 과잉’이 빚은 ‘피로사회’로 규정하는데, 과연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긍정성의 과잉 때문일까, 아니면 욕망의 과잉 때문일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육체적인 본능적 욕구를 넘어 정신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유일한 주체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기에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라깡(1901~1981)은 이런 욕망을 무의식으로부터 발호하는 모호한 대상을 끊임없이 쫓는 ‘주체의 결핍이자 환유(métonymie)’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욕망은 무의식 속의 자아(상상계의 ‘이상적 자아’, moi idéal)가 주체적 자아(상징계의 ‘자아 이상’, idéal du moi)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실체 없는 존재의 실재를 붙잡으려는 데서 오는 주체의 근원적인 결핍 현상을 의미한다.

욕망은 오래전부터 몸(육체)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발원하는 본능의 하나로 이해되었으며, 육체적 결핍에서 오는 몸의 욕망은 정신적 결핍에서 오는 정신의 욕망보다 철학적으로 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심지어 욕망 자체가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 예속해 있는 육체의 탓으로만 돌려지기도 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변화하는 육체보다 불변적인 정신을, 그리고 쉽게 외부로부터 감염되는 감정보다 순수한 이성을 중시해 온 서구 주류 사상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생물학적 필요와 요구로부터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그것이 충족되면 소멸하는 일반적 욕구와 달리 근본적으로 한계가 없는 정신의 무제약적 행위에 근거한다. 즉 신체적 욕구는 생리적 한계를 갖지만, 정신적 욕망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인간이 ‘욕망의 주체’인 것은 신체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이 신체와 전혀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몸은 정신을 매개하는 수단인 만큼 욕망 역시 본질적으로 신체의 기능 없이는 불가능하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결핍을 메꾸려는 데서 비롯되지만, 욕망을 부추기는 요소는 다양하다. 현대사회는 구조적으로 끊임없는 탐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간을 다양한 욕망으로 이끈다. 탐욕이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한 모습이다. 미디어의 발전이 ‘인간의 확장’을 가져왔다고 주장한 매클루언(1911~1980)의 말처럼 현대사회는 미디어·인터넷·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으로 물리적인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인간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이와는 달리 지젝(1949~ )은 현대사회를 일상화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하고 이를 경고하는데,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란 참여하는 자들의 무지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의 실재를 은폐하는 ‘환상적 구성물’의 일종이다. 이런 욕망의 이데올로기는 특히 우리 사회에서 집단의 이익과 권력을 숨기는 충실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현대 영성가인 그륀(1945~ ) 신부의 말처럼 탐욕은 결국 병적인 소유욕으로 발전하는 만큼 우리는 건강한 삶을 위해 무엇보다 욕망을 부추기는 과도한 탐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