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탓하기 전에 안아주시는 분

(가톨릭평화신문)



우리는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생각과 기준에 맞춰 임의대로 무자비한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 결점 있는 사람, 잘못을 저지른 사람,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손가락질하고 경멸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의인이라고 자처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래전 한 젊은 사제의 면직 소식을 접하고 한숨을 쉬며 비판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후배 사제가 혼잣말로 되뇌는 것을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다. 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 사제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보통 사람의 잣대로 나의 형제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떤 변명으로도 자신이 지은 잘못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을 보시며 혀를 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겪었을 자녀의 마음고생에 더 마음을 쓰시는 분은 아닐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죄를 지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양심이 있는 한 스스로 잘못했음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서 가산을 탕진한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문전박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가 돌아오기를 노심초사 기다렸고, 그를 보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안아주었다. 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지었는지를 깨닫고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그저 안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요한 8,1-11 참조)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이야기를 풀어 설명하신 한 은사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떠오른다. “여인아, 너는 죄보다 더 소중하다. 용서로 새로 시작하는 삶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그렇다. 인간은 죄보다 소중하다. 죄를 지어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히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죄가 아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을 수 있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알고 있는가? 죄나 잘못으로 인해 혹은 다른 이유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감정에 파묻혀 헤매지 말고, 작은아들처럼 고개를 들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시다. 우리가 얼마나 괴로움 속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말이다. 용서와 평화! 그리고 이미 그것을 주셨다!

살다 보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며, 도저히 헤어나올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때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하셨던 마지막 말씀을 떠올려보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렇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우리 눈에 살 길이 막막하고 미래가 암울해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해결책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일을 이미 이루고 계신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 반드시 이루어내신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안에서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며, 주님의 계획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일 것이다.

삶의 길에서 지치고 힘들 때, 혼자라고 느껴질 때, 스스로에게 말해보자. “나는 죄보다 소중하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