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순교복자수도회의 남북 청년 멘토링 사도직 ‘띠앗머리’ 멘토·멘티 청년들이 수도회 피정의 집 소성당에서 한장호 신부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오른쪽부터 임수진, 김지향, 신명도, 문성영씨)
멘토링으로 출발해 동아리 활성화
풋살·시·성경·댄스 등 분야도 다양
서로의 일상·고민 나누며 결속 탄탄
14년 동안 13기까지 174명 활동
‘통일을 미리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
분단 80년의 아픔과 기구한 역사 속에서 평화를 향한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이러한 현실 앞에 피로감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짊어진 3만여 명의 북향민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통일부는 올해 1~3월에도 38명이 탈북했다고 전했다. 그중 20~30대가 절반이 넘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도 있는 이웃이자 동료이며 친구다. 평화와 통일 담론에 대한 피로감을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제2회 북한이탈주민의 날(7/14)을 맞아 분단된 현실 속에서 ‘통일을 먼저 살아가는’ 공동체 ‘띠앗머리’(지도 한장호 신부)를 만났다.
형제자매가 된 남남북남 남녀북녀
“명도야 야구장 가자.” “저 그날 약속 있어요!”
문성영(바오로)씨가 우스갯소리로 동생 신명도(마르첼리노)씨에게 또 거절당했다며 투덜거린다.
“관장님이 빨리 시합 준비하자고 하네.” “언니는 왜 이렇게 운동을 좋아해? 우린 취미가 참 달라.”
이번엔 동생 김지향(루치아)씨가 언니 임수진(율리안나)씨에게 취미활동 좀 맞춰보자고 보챈다. 툭툭 내뱉는 말 속에 남남북남, 남녀북녀가 이룬 사소하지만 따뜻한 가족의 풍경이 담겨 있다.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평범한 청년들인 이들은 ‘띠앗머리’가 연결해준 남북 형제자매다. 함께 캠핑도 가고 여행도 다니면서 어디서도 말 못할 속 이야기까지 터놓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
문씨는 “누나·여동생만 있었는데, 남자 형제가 생겨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흐뭇해했고, 임씨도 “지향이는 오히려 저를 챙겨주는 야무진 친구”라고 자랑스레 소개했다. 분단의 상처가 새로운 가족형태 안에서 치유되고 있는 모습이다.
가족공동체 띠앗머리
‘띠앗머리’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남북 청소년·청년 멘토링 사도직으로 2011년 4월 4일 발족했다. 남한 청년을 ‘띠앗’, 북한 청년을 ‘나무’라 부르며 1대1 관계를 맺어주는 형태다. 띠앗머리는 ‘가족애’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북향민 청소년·청년들을 한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정서적 멘토링이 그 시작이었다. 개별적으로 만나 일상을 공유하며 즐기기도 하고, 수도원이나 피정의 집에서 교육과 캠프에 함께하는 등 삶을 가족처럼 동반한다.
그렇게 남북 젊은이들의 관계가 이어진 지도 어느덧 만 14년을 넘겼다. 흐른 시간만큼 수많은 이가 참여하며 하나의 큰 공동체를 이뤘다. 현재 13기까지 멘토 72명, 멘티 102명을 합쳐 총 174명이 띠앗머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멘토링 관계를 넘어 자체적으로 동아리도 결성했다. 풋살·시·성경·독서·등산·댄스·언어부터 봉사와 육아까지 본인이 원하는 취미 하나는 있을 정도로 분야도 다양하다.
“풋살하는 날만 기다려요. 함께 땀 흘리고 한 잔하는 게 요즘 가장 큰 낙입니다.” 동아리 활동은 북한 청년뿐 아니라 남한 청년도 비슷한 또래와 소통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북향민을 위한 여러 단체가 사회부적응과 정신적 고통 등에 집중하는 가운데, 띠앗머리는 그들이 가족으로서 실질적으로 이 땅에 뿌리내리고 성장하도록 동반하고 있다. 신명도씨는 “동향인끼리 모이려는 문화가 있는데, 그럴수록 더 고립되는 것을 본다”며 “띠앗머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평범한 청년 중 한 명이라는 소속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띠앗머리 유아세례식. 한장호 신부 제공
띠앗머리 결혼식. 한장호 신부 제공
???????평범한 한국사회 청년
김지향씨와 신명도씨는 여느 북향민처럼 생사를 넘나들며 한국 땅을 밟았다. 그만큼 운도 따랐기에 가능했다. 이들이 목숨 걸고 혈혈단신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자유를 찾아서다. 잘 알려졌다시피 K-문화의 영향은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김씨와 신씨도 한국 노래와 드라마에 매료돼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남한에 정착해 여대에 입학한 김씨는 10살 어린 학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니며 밥 먹을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다. “북한에서 왔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어요. 중국 유학생 한 명이 유일한 친구입니다.”
낙담할 수 있는 상황에서 띠앗머리는 김씨의 숨통을 틔웠다. 말 그대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김씨는 뛰어난 노래 실력을 살려 띠앗머리 음반에 보컬로 참여하면서 가진 재능을 맘껏 펼치는 중이다.
김씨 멘토 임수진씨는 “이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참 무지했던 저를 반성한다”고 했다. “북한 하면 일단 정치 등 여러 부분에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잖아요. 그들에게 익숙지 않은 정말 사소한 단어나 문화 정도 알려주는 점 말곤 크게 신경 쓸 게 없었습니다.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신씨는 비교적 어린 18살에 홀로 압록강을 건넜다. 가톨릭계 학교인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해 남다른 친화력으로 순식간에 ‘인싸’가 됐다. 사소한 문화 차이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친구들이 미용실에 간다는 거예요. 제가 이발소를 가야지 왜 미용실을 가느냐고 바로 반문했죠. 북한에서 미용실은 여자만 가거든요.”
잘 적응하며 대학생까지 됐지만, 마음 한편엔 북에 두고 온 가족이 늘 자리 잡고 있다. 그럴 때마다 신씨는 띠앗머리 가족들을 불러 엄마가 해준 요리를 직접 만들어 대접하기도 한다.
신씨 멘토 문성영씨는 “최근 여러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북향민은 ‘갈등의 비주류’에 속하는 것 같아 오히려 다행인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조부모가 북향민이라 개인적으로 이질감이 없기도 하지만, 매스컴에서 자극적인 내용만 다루는 점은 아쉽다”며 “이들은 북이 고향일 뿐 취업과 연애·결혼을 고민하는 평범한 이 시대 청년”이라고 말했다. “사회가 조금만 더 편견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줬으면 합니다”
통일을 사는 사람들
인원이 200명 가까이 되다 보니 띠앗머리는 이제 하나의 작은 사회가 됐다. 그 안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린 이들도 있고, 사소한 오해가 쌓여 갈등 중인 이들도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여느 친구 사이에서 있을 법한 오해와 의견 차이 때문이다.
한장호(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신부는 “띠앗머리는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동체를 이뤄왔다”면서 “우리는 ‘통일을 미리 살아본 사람들, 지금도 통일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훗날 통일이 되면 띠앗머리가 만든 문화는 분명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랑받고 싶고, 노래하고 싶고, 춤추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고, 친구들과 대화하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있지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잖아요. 이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함께하는 거죠. 거창하게는 ‘자아실현’이라고 할까요. 그저 ‘사람답게’ 살자는 겁니다. 때론 갈등도 생기지만, 다시 오해를 풀면서 함께 성장해가는 중입니다. 신앙적으론 하느님 나라를 함께 건설하는 거고요.”
정서적 멘토로 시작한 띠앗머리는 ‘가족애’라는 뜻처럼, 이제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가족공동체가 됐다. 분단의 현실 속에서 통일을 미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띠앗머리’ 가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