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출입을 금하는 ‘노키즈존’(No Kids Zone)에 이어, 최근에는 ‘노시니어존’(No Senior Zone)까지 등장했다. 문득 정년을 앞둔 한 원로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경험담이 생각났다.
커피가 당겨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앞 새로 생긴 카페에 들어가 입구 빈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점원이 다가와 난감한 표정으로 “어르신, 죄송하지만 안쪽 자리로 좀 옮겨주시겠어요?” 하더란다. 이유인즉, 노인이 입구에 있으면 젊은 학생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시니어존’이라는 표지를 내걸지만 않았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 노인들의 출입을 반기지 않는 곳이 꽤 많았던 듯하다.
‘노(No)’는 그 뒤의 대상에 대한 금지, 즉 차별을 넘어 혐오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그 결과 ‘노키즈’는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낳아 저출생을 확산시켰으며, ‘노시니어’는 노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그리고 ‘노인혐오사회’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노인혐오’가 ‘노시니어존’을 만들어냈다는 반대 논리도 가능하다.
나이듦은 인간이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보편의 인간 발달이자 변화다. 날 때부터 노인인 사람도, 영원히 청년인 사람도 없다. 지금의 노인도 과거에는 청년이었듯 지금의 청년도 미래에는 노인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로로 만드셨다. 전지전능한 하느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충성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그 시간 앞에 이르기 전에는 그 뒤에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없다. 그 나이가 되기까지는, 그 시간을 직접 살아보기까지는 그 나이의 삶 속에 감춰진 인생의 진리를 알아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딱 지금의 나이만큼 무지하고, 딱 지금까지의 경험만큼만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다만 내 나이를 넘어, 내 경험을 넘어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미로를 걸어간 선배·노인들을 통해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조부모와 노인을 위한 날’을 선포하시면서 노인들의 소명은 “뿌리를 보존하고, 젊은이들에게 신앙을 전하며, 어린 그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인생 중 60년·70년·80년의 시간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고는 그 시간의 경험과 지혜를 살 수 없다. 즉 노인이 되지 않고는 결코 노인의 지혜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조부모와 노인을 주셔서 무지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지혜를 빌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세대는 연결되어 있고 지속적으로 순환한다. 한 세대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또 그다음 세대로 연결된다. 연결되고 순환하는 순리를 깨뜨리고 세대를 단절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삶과 우리 사회를 쇠퇴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광복을 통해 경험했듯이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빼앗긴 나라는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지 않고 인구가 줄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세대가 단절되는 순간, 사회도 개인도 성장과 발전을 멈추게 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더욱이 똑같이 무지한 같은 세대 내 관계보다도 앞서거나 뒤이은 다른 세대들과의 관계를 통해 더 많은 배움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한정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