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신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시중드는 일에 분주합니다. 반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여성인 마르타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더더욱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향한 인간의 두 가지 대표적 유형이 드러납니다. 이는 교회의 두 가지 유형이기도 합니다. 마르타의 행동에서 실천적 활동을 보게 되고, 마리아의 행동에서 관상과 기도의 생활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겉으로는 분명 마리아의 행동이 마르타보다 훨씬 유익해 보입니다. 물론 사랑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기본이 되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복음은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모습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론과 실천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한 사상으로 흐를 수 있고 이론 없는 실천은 설득력 없는 억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허한 사상과 설득력 없는 억지를 극복해야 하듯이, 신앙 안에서도 ‘사랑의 실천’과 ‘말씀에 경청’하는 자세가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마르타를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조화로운 관계로 오늘 복음을 읽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나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나 모두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마리아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이러한 마리아를 보고 마리아의 몫을 빼앗으려고 했기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타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몫은 몫대로 인정하시면서 동시에 마리아가 택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십니다. 마르타는 귀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좋은 음식으로 잘 대접할 생각이었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다가가 말씀을 새겨들음으로써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했습니다. 모두가 다 소중한 몫입니다. 현실적으로 마리아처럼 늘 예수님의 발치에만 앉아있을 수 없고, 마르타처럼 늘 시중만 들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은 관상과 기도를 통해 활동할 수 있는 은총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TH그린은 오늘 복음을 통해 (참조 ‘장터의 어둠’) 예수님의 속마음을 헤아려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결코 나무라지 않으시며, 마치 부모가 자식들이 잘되도록 바로잡아 주듯 예수님의 마르타를 향한 타이름 안에는 깊은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사랑을 느끼는 가운데 주어진 역할과 삶의 의미가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을 선택해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남의 몫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몫을 소중히 여기고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수많은 일에 관여하고 참견하며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 우리 마음이 그만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일에는 소홀합니다. 주님께 향한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은 가장 좋은 몫을 제일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온갖 핑계와 잡다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수한 첫 마음을 오롯하게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