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입니다. 단상을 열며 안부를 먼저 묻습니다. 한여름 무더위, 무탈하신가요? 이동 노동자라고 하죠. 배달·택배·우체국 등 그분들의 노고와 농민의 땀방울, 그리고 공소의 밭에서 고생하시는 수녀님들을 떠올리며 평안과 쉼을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건강하게 여름 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체를 모시는 날입니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작은 준비를 시작합니다. 이른 아침, 어머니 마리아가 동네 꽃집에서 사오신 생화를 꽃병에 꽂고 침상 곁 테이블 위에 올려둡니다. 그 꽃은 제 방 안에 성전의 숨결을 불러옵니다.
준비는 전날부터 시작됩니다. 병자 영성체 하루 전에 목욕합니다. 몸이 불편한 제게는 큰일이지만, 그 시간은 단지 씻는 행위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깨끗한 상태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작은 예식입니다. 성체를 모실 자리를 정결하게 마련하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신부님이 오시기 전, 저는 태블릿 화면을 끄고 묵주를 꺼냅니다. 미사 전 성전에 일찍 들어가 성체조배나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처럼 저는 병자 영성체 예식 전에 묵주기도를 바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신비를 드리는 일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습니다.
묵주기도는 침묵 속에서 천천히 흐릅니다. 미약하지만, 제 안에서 기도는 숨결처럼 흘러갑니다. 침묵은 하느님을 향한 분명한 언어입니다. 아멘이라는 고백은 소리로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드리는 응답이 됩니다.
신부님의 초인종 소리가 들리기 전, 저는 이미 일어섰습니다. 영적으로 제 영혼은 자리에서 벌써 일어나 작은 제대를 정돈해두고, 생화 곁에서 함께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자리는 그렇게 제 마음 깊이 미리 마련된 셈입니다.
이제 성체를 모시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신부님 손에 들린 성체가 제게 향하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 앞에서 저는 “아멘”, 믿음의 고백을 드립니다. 그 순간, 병든 제 육신은 성전이 되고, 성령님의 숨결이 감돕니다.
영혼은 맑은 물 위에 띄워진 듯 평화롭습니다. 하루는 이전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성체를 모신 날의 공기·눈빛·언어, 모든 것이 조금 더 유연하고 온유해집니다. 제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하루를 다르게 만듭니다.
작은 일상 속에서도 성체는 울림으로 남습니다. 글을 쓰는 손끝, 기도를 드리는 시선, 잠들기 전 고요한 마음까지도 그분이 중심이 됩니다. 성체는 내 안에 들어오신 순간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루 전체를 물들이는 색깔이 됩니다. 이 신비는 아마 매번 새로이 주어지는 ‘오늘의 은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체를 모신 날은 그 자체로 축복이며, 제가 여전히 살아 있고, 주님을 향해 열려 있다는 기적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누운 채로 살아가는 삶은 자칫 단조롭고 반복적인 시간일 수 있지만, 병자 영성체가 있는 날은 그런 시간 위에 주님 발걸음이 새겨지는 날입니다. 하루가 하느님 현존으로 덧칠되고, 존재의 결이 달라집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을 모시기 위해 준비했고, 이제는 그분 안에 다시 하루를 놓아드립니다. 다음 만남까지 이 하루를 오래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저에게 병자 영성체로 맞이하는 ‘성찬’은 말입니다. 한 달을 손꼽아 기다린 그리움입니다. 여러분에게 미사를 통해 거행되는 영성체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주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겉옷이며 체면도 불구하고 볼품없을지언정 나무 위로 올라간 자캐오처럼 주님을 향해 애타는 마음으로 손을 뻗습니다.
자캐오는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그리움으로 품었던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선비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