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세상 구원을 위해 기꺼이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의 목숨을 바친 103위 순교 성인을 기리는 날입니다. 올해 한국 성인 103위 대축일은 경축 이동으로 21일 기념합니다.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 신부. 가톨릭평화신문DB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 신부는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와 함께 조선 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순교길에 올랐습니다. 모방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 이름은 세례명 ‘베드로’를 한문으로 음차해 백다록이라고 했습니다.
모방 신부는 1829년 5월 13일 사제품을 받고 동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접하면서 선교사가 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선교지인 중국 사천으로 가는 도중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와 만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1833년 3월 조선 선교사를 자원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전 이미 대목구장 직무대행(provicaire)으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주교의 장례를 치르고, 조선 교회 밀사들을 만나 조선 입국을 결정했습니다. 1836년 1월 13일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가 탄생한 순간입니다.
조선말이 서툴렀던 모방 신부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 때 한문으로 글을 썼습니다. 서울·경기도·충청도의 교우촌 16~17개를 방문해 세례를 주고 여러 성사를 집전했습니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김대건(안드레아) 등 세 명의 소년을 택해 라틴어와 덕행을 가르쳤습니다. 또 당시 조선 내에서 신학생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3일 이들을 중국 마카오로 보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1837년 1월과 12월 말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까지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자 조선 교회는 프랑스 선교사 3명의 헌신에 힘입어 커다란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39년 기해년, 배교자의 밀고로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이 정부에 알려졌습니다.
기해박해가 본격화하자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앵베르 주교가 자수했고, 모방 신부도 충청도 홍주 교우촌으로 숨어들었다가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했습니다. 샤스탕 신부까지 자수하면서 결국 세 선교사는 포도청 옥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방 신부의 나이는 불과 35세였습니다. 모방 신부는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