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부자와 불행한 처지에 놓인 거지 라자로가 있었는데, 죽음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으로 가고, 부자는 땅에 묻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복음의 비유는 명확해 보이면서도 담긴 뜻은 깊습니다.
먼저 복음의 비유에서 중심 인물이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가난하고 고생하는 라자로보다는 부자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중심 인물이고 라자로가 조연임에도 부자는 이름이 없고 라자로(‘하느님께 의지하는 자’라는 의미)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부자는 불행해지고, 그의 마지막 처소는 저승입니다. 이름이 없음은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그가 담장 안의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화려하게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집 대문 앞에 있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에게는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도 주지 않을 정도로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그래서 담장 안과 밖의 관계는 끊어지고 소통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담장 밖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고 난 후에는 라자로가 있는 천당과 부자가 있는 저승 사이에 그의 집 높은 담장만큼 깊고 큰 구렁이 가로놓여 부자가 천당에 갈 수도 없고, 라자로가 저승에 있는 부자에게 물 한 방울 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관계의 단절. 그것이 가장 큰 불행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하느님의 벌이라 생각하던 관념에 대해 반박합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거지 라자로와 부자 중에 여러분은 누구와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끼니조차 걱정하는 라자로처럼 자신을 거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음 속 부자의 모습에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부자 모습을 통해 깊이 묵상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비유에서 왜 부자가 죽어서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악을 행했다든지, 나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든지 하는 내용도 나오지 않습니다. 부유함 그 자체가 선은 아니지만, 또한 악도 아닙니다. 따라서 부유함이 부자가 고통을 받는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주목할 점은 부자가 고통받는 이웃에 대했던 태도입니다. 거지 라자로를 집 대문 앞에 두었던 것은 관용이 아니라 ‘무관심한 생각’을 드러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애덕이 아니라 ‘무관심한 행위’를 드러냅니다. 개들이 종기를 핥는다는 것도 ‘무관심한 마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자가 이웃의 어려움에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의 모습은 옛날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죄임을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배운 이와 못 배운 이, 좌와 우 다양한 방면으로 많은 이와 깊이 관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 사람인 사제이지만, 싫은 사람은 외면하고 싶습니다. 사실 좋은 사람, 잘해주는 사람만 만난다면 편하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복음의 부자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것입니다.
무관심하고 차가운 마음은 천국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주위 어려움에 관심을 갖고 보살피며 따뜻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