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30일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열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희망의 대순례’는 주님 부활 2000주년을 맞이하는 2033년을 준비하며, 아시아 지역 교회 간 만남과 친교를 바탕으로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FABC는 특히 시노드 정신을 토대로 기도와 대화, 문화적 교류를 이어가며, 아시아 전체 인구의 약 3%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선교를 향한 새로운 희망을 되살리기를 바랐다. 나흘간 이어진 ‘희망의 대순례’ 주요 일정을 정리했다.
말레이시아 페낭=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교황청 복음화부 첫 복음화와 신설 개별교회부서 장관 직무 대행 루이스 안토니오 고킴 타글레 추기경이 11월 27일 말레이시아 페낭 라이트 호텔에서 FABC 희망의 대순례 개막을 알리며 초에 불을 붙이고 있다.
2033년을 향해 아시아 사람들이 함께 걷는 ‘새로운 길’
“희망의 대순례 시작을 공식 선포합니다.”
FABC ‘희망의 대순례’는 11월 27일 말레이시아 페낭 라이트 호텔에서 교황청 복음화부 첫 복음화와 신설 개별교회부서 장관 직무 대행 루이스 안토니오 고킴 타글레 추기경의 선포와 기조연설로 본격 여정의 막을 올렸다. FABC는 이 기간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의 연설을 통해 아시아 교회가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나서기 위해 반드시 숙고해야 할 주제들을 참가자들이 묵상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타글레 추기경은 ‘새로운 희망의 순례자들로서 다른 길을 걸어가기’라는 주제 연설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새로운 길’을 따라가는 우리 시대의 동방 박사가 되자”고 초대했다. 그는 “복음 속 동방 박사들은 눈부신 예루살렘이 아니라 겸손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이는 열린 마음과 희망, 겸손한 자세로 순례에 나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헤로데는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고, 이는 겸손을 잃은 이가 결국 부패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덧붙였다. 이어 “겸손과 연대의 자세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간 예수님의 길을 묵상하며, 우리도 ‘현대의 동방 박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레이시아 주교회의 의장 포훈셍(쿠칭대교구장) 대주교도 ‘아시아인으로서 함께 여정을 걸어가기’ 연설에서 “아시아의 복음적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시노달리타스를 바탕으로 모든 피조물,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이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는 인구가 가장 많으면서 동시에 가난한 이들이 가장 많은 대륙이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30세 미만인 젊은 대륙이라는 점에서 교회가 이들을 향해 새롭게 헌신하고 대응할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포 대주교는 FABC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작성된 「방콕 문서」를 언급하며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종교·사회 현실을 포용하고 대화·연대·선교의 관점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호 존중과 개방성, 겸손,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대화는 아시아 복음화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며 “복음 전파는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인정하고 이에 기반을 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FABC 부의장 파블로 비르질리오 다비드(필리핀 칼루칸교구장) 추기경은 11월 29일 ‘예수님의 이야기를 삶으로 실천하고 나누기’ 강연에서 “아시아 교회는 조화·연민·환대·회복력·희망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해온 교회”라며 “강제적 개종의 과거를 반성하고, 시노드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환대하며 깊은 관계성을 지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2033년을 향해 나아가는 아시아 교회는 이주·빈곤·디지털 환경 변화·환경 문제·청년·여성·원주민 문제 등을 성령의 인도 아래 진지하게 바라보고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타글레 추기경이 11월 29일 말레이시아 페낭교구 성 안나 준대성전에서 FABC 추기경단과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있다
나흘간 이어진 대화와 경청…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용기
이번 ‘희망의 대순례’ 현장은 강연뿐 아니라 순례자들이 매일 의견을 나누고 경청하는 ‘시노드 대화의 장’이었다. 특히 11월 28일에는 ‘아시아인으로서 함께 여정을 걸어가기’ 기조연설 이후 각 지역 교회 구성원들이 한 시간 동안 시노드 대화를 진행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FABC는 테이블별 논의 내용을 요약해 공개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은 아시아 교회가 일치된 움직임 안에서 새로운 복음화와 깊은 신앙, 용기 있는 선교, 시노드적 친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룹별 시노드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공동체의 일치는 경청에서 시작되고, 경청은 참여로 이어지며, 결국 변화로 나아간다”면서 “가난한 이들, 이주민, 노인,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해 말뿐이 아닌 증언으로 복음화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희망의 대순례는 그리스도인이 소수인 지역 교회 신자·선교사들에게 큰 용기를 선사한 시간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페낭교구 신자로 행사 준비에 참여한 제임스 조닉(52)씨는 “무슬림이 다수인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우리 손으로 준비한 행사에서 다른 지역 형제자매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점이 무척 자랑스럽다”며 “우리의 초대에 응해 먼 길을 와준 모든 이에게 무척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대교구 소속 크리스티나 조셉(43)씨는 “처음에는 큰 기대가 없었지만, 행사 규모와 분위기에 놀랐고, 많은 형제자매가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에 더욱 감동받았다”며 “더욱 힘을 얻어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뻐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도직을 수행 중인 가타리나(가명) 수녀는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위해 여러 사람이 연대해 줘 큰 위로를 받았다”며 “이번 순례에서 얻은 용기로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겠다”고 밝혔다.
인도의 생활 성가 밴드 Rexband가 희망의 대순례 문화 프로그램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FABC 희망의 대순례 참가자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체 조배를 하고 있다.
문화 교류 속 현대 복음화 과제 집중 탐구
‘집중 토론’ 세션에서는 현대 사회 속 복음화의 다양한 과제를 논의했다. 11월 28일 토론에서는 △디지털 미디어와 인공지능 △청년 사목 △다원화 사회 속 그리스도인의 삶 △다종교 맥락 속 평화·화해·회복 탄력성 △「찬미받으소서」 관점의 통합 생태론 △교회의 시선에서 바라본 여성성 △시노달리타스 등이 논의됐다. 29일에는 △음악·디지털 혁신을 통한 창의적 복음화 △TV 시리즈의 복음화 활용 △젊은이 동반·양성 △일터 선교 △다문화·다종교 상황의 복음화 △교회의 성 정체성 시각 △‘선교 제자 양성’을 위한 새로운 가톨릭 도구 등을 주제로 토론했다.
희망의 대순례에 참가한 이들은 아시아 교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다시금 체험했다. 11월 28일 밤 열린 문화 프로그램은 인도네시아 대표단의 전통 무용 공연으로 시작됐다. 인도 대표단은 ‘평화·희생’ 등 교회 가르침을 담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발리우드 스타일의 단체 공연을 펼쳐 박수를 받았다. 홍콩 대표단은 홍콩 출신 사제가 만든 노래를 합창하며 전날 화재로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일본·몽골 대표단은 전통 의상을 착용하고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했다. 인도 출신 생활성가 그룹 ‘렉스밴드(Rexband)’는 전례 때마다 인도 전통 음악을 가미한 공연을 선보여 경건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페낭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 성 안나 준대성전 순례
참가자들은 폐막을 하루 앞둔 11월 29일 페낭교구의 성지인 성 안나 준대성전을 순례하며 타글레 추기경 주례와 아시아 교회 추기경·주교·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미사를 위해 성당을 찾은 순례자와 본당 신자 2200여 명은 말레이시아 전통 가옥 양식을 반영해 만든 성당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1846년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옛 성당과 19세기 말 확장 공사를 거쳐 만들어진 새 성당이 공존하는 이곳은 오늘날까지 페낭교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순례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왔다.
타글레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처럼 우리 모두를 기다려 주시고 동행해주고 계신다”며 “삶 속에서 혼란과 의심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주님은 항상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의 두려움과 질문을 풀어주시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에도 우리를 이끌어주고 계신다”고 전했다. 또 “부부는 물론 교사, 공동체 구성원 간에도 삶의 모든 부분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함께 길을 걸어간다는 믿음이 있기에 연대하고 2033년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것”이라며 “2033년은 분명 기념할 만한 때이지만, 이는 복음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교회 대표단 청년들이 11월 30일 FABC 희망의 대순례 행사장에서 말레이시아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 청년 주솔비씨가 11월 28일 말레이시아 페낭 라이트 호텔에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홍보하고 있다.
FABC 희망의 대순례 기간에 설치된 2027 서울 WYD 홍보 부스.
2027 서울 WYD를 향한 관심과 기대
FABC ‘희망의 대순례’는 아시아 각 지역 교회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를 향해서도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많은 청년 참가자들이 이번 행사에서 느낀 친교의 기쁨을 서울 WYD에서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일본 대표로 참가한 하루토 오구치(19)씨는 “다른 나라 청년들과 대화하고 서로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 큰 행복이었다”며 “서울 WYD에서 더 다양한 청년들을 만날 생각에 설렌다”고 말했다.
30년 전 마닐라 WYD에 참여했던 이들은 서울 WYD가 한국과 아시아 교회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필리핀 대표단의 닝 리아레나스(51)씨는 “마닐라 WYD는 제 개인 신앙을 깊게 하면서 필리핀 교회 전체에도 큰 활력을 선사했다”며 “서울 WYD는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 청년에게 만남과 은총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FABC 희망의 대순례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
한국 대표단은 아시아 신앙인들의 뜨거운 관심에 응답하며 서울 WYD를 적극 홍보했다. 한국 대표단은 부스를 설치해 교회 관계자와 청년들을 직접 만나며 WYD의 의미와 가치를 알렸다. 주솔비(라파엘라, 28, 인천교구 범박본당)씨는 “WYD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전 세계 청년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는 특별한 순례의 길”이라며 참여를 요청했다.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김동원 신부는 “아시아의 선교 비율이 약 3.4%에 불과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서울 WYD는 아시아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고 복음화에 헌신하도록 문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추기경단도 서울 WYD가 아시아 교회 전체의 복음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대회가 되길 희망했다. FABC 의장 필리페 네리 페라오 추기경은 “서울 WYD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교회에 매우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며 “전 세계 청년들이 모이는 자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스스로 주님 은총을 증언하는 이들이 되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페낭교구장 세바스티앙 프란시스 추기경도 “전 세계, 특히 한국과 중국·일본 교회는 출산율 감소로 청년 사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한·중·일 교회를 넘어 전 세계 모든 청년이 서울 WYD에서 희망의 빛을 만나고 이를 통해 새롭게 동기 부여를 받았으면 한다”고 기도했다.
장신호 주교(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장)
한국 교회를 대표해 FABC ‘희망의 대순례’에 참석한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장 장신호 주교는 이번 행사에 대해 “한국 교회에 대한 아시아 교회의 기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다”고 밝혔다.
장 주교는 “FA BC는 2006년 치앙마이에서 열린 제1회 선교대회와 2023년 발표한 「방콕 문서」 등을 통해 1000~2000년기 유럽·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선교에 이어 3000년기에는 아시아 교회를 선교해야 한다는 투철한 선교 의식을 밝혀왔다”며 “현재 아시아 전체 복음화율은 3~4% 정도지만, 이를 장기적으로 최소 10%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게 아시아 교회의 잠정적 목표”라고 설명했다.
장 주교는 “각국에서 20~30명씩 대표단이 왔는데, 이들과 대화하며 시노드적 교회로의 전환이 더욱 체감됐다”고 말했다. 실제 이번 ‘희망의 대순례’ 내내 각국 추기경과 주교들은 참가한 평신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했다. 장 주교는 또 “동시에 2029년 혹은 2030년에 한국에서 아시아 선교대회를 개최하고, 한국 교회가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영적·인적·물적 도움을 전하는 주체로서 더욱 나누는 교회로 성장해주길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전했다.
장 주교는 아시아 교회와의 교류 활성화에 앞서 한국 교회가 마주한 시급한 과제로 언어 장벽 해소·복음화 질적 성장을 꼽았다. 장 주교는 “FABC, 아시아의 모든 교회와 교류하는 데 있어 언어 때문에 우리가 고립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면서 “한국 교회 역시 아시아 교회의 꿈에 발맞춰 질적 성장을 위한 복음화 연구, ‘전 신자 성경 말씀 갖기 운동’ 등 내적 복음화 성장을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 나간다면 아시아 교회 전체 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