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향숙 평화칼럼]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까닭
(가톨릭평화신문)
찬사 속에도 비수는 있다. 사랑받는 책에도 비난이 따른다. 월간지 독자 엽서 한 귀퉁이에서 ‘최고의 글’로 뽑힌 칼럼이 다른 귀퉁이에서는 ‘최악의 글’로 낙인찍히곤 했다. 5년 전 로버트 배런 주교의 「가톨리시즘 Catholicism」을 두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전화하던 한 독자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가톨리시즘」을 만난 것은 10여 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종교 교육 대회에서였다. 교구 차원에서 열렸지만, 참석자 수나 규모로는 거의 세계 대회 같았던 이 행사는 영어·스페인어·베트남어 등 언어들의 축제이자 다양한 강의와 워크숍과 다문화 전시 등이 어우러지는 신앙의 장이었다. 도서 전시장에는 당시 영미권에서 출판된 가톨릭 서적이 총망라된 듯했다.
사인회 안내를 따라 간 장소에는 여러 저자의 이름표가 붙은 책상들 사이로 한 줄이 유독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가톨리시즘」 저자 로버트 배런 주교 앞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줄 속에서 나는 이 책의 운명을 예감했다. 저자 로버트 배런은 지금 미네소타주 위노나-로체스터 교구장이다. 현대 가톨릭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전하는 신학자이자 미디어 사도로, 2025년 요제프 피퍼(Josef Pieper) 상을 받았다.
세계 가톨릭 유산을 담은 영상으로 유명한 이 책의 원서는 뜻밖에도 단색 이미지뿐이었다. 저작권 없는 이미지는 계약할 수 없었고 텍스트만 덩그러니 계약해 이미지를 하나하나 새로 준비해야 했다. 긴 산고 끝에 한국어판이 세상에 나온 것은 6년 전이었다.
그 후 몇 달 뒤, 분노로 가득한 한 독자의 전화를 받았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Deus fit homo ut homo fieret Deus)” 책 속의 이 한 문장이 그분을 분노케 했다.
나는 황급히 ‘권위’를 들이댔다. “이 문장은 아타나시오나 이레네오 성인들 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이 즐겨 썼던 ‘신화(神化, Theosis)’ ‘하느님화’ 교리의 핵심입니다. 교회 인가도 났고요.”
“말도 안 됩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떨렸다. 거의 신성모독을 보는 듯한 혼란을 겪는 듯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땅의 인간 사이에는 ‘절대적 간격’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이 글귀가 그분에게는 마치 뱀이 하와를 꼬드긴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과 같기라도 한 듯했다. 그분이 믿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유일무이하며,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분’이었다. 이 문장은 그분에게 범신론의 말, 뉴에이지의 헛소리처럼 들렸을 터였다.
귀를 막고 포효하는 그분에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5년이 지났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분에게 말하고 싶다. 그 말은 유혹이 아니라고. 교만하라는 부추김이 아니라고. 그것은 사랑의 편지라고. “네가 얼마나 존귀한지 아느냐”고 속삭이는 하느님의 뜨거운 고백이라고.
우리는 그저 흙으로 돌아가고 말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의 생명, 그 영원하고 따뜻한 사랑의 불덩어리 속으로 초대받은 이들이다.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놀라운 신비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하느님의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이 진리를 아직도 온전히 깨닫지 못한 나는 주님께 기도한다.
“하느님, 당신이 저처럼 되신 것은 제가 당신처럼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려 하심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