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본당 양촌공소, ‘순교자의 땅’에 세워진 내포 교회 신앙 못자리

(가톨릭평화신문)
대전교구 합덕본당 양촌공소는 합덕본당을 비롯한 대전교구 모든 본당의 모체와 같은 신앙 못자리이다. 양촌공소 전경.

대전교구 합덕본당 양촌공소는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2길 12(상궁리 715-24)에 자리한 대전교구 모든 본당의 모태이다.

예산군 서부 지역인 고덕면 상궁리는 조선 시대 덕산군(德山郡) 거등면(居等面) 상궁리(上宮里)로 웃말 ‘상리’(上里)와 궁궐과 관련된 마을 ‘궁리’(宮里) 두 마을이 합쳐진 이름이다. 덕산군도 고려 시대 덕풍현(德豊縣)과 이산현(伊山縣)이 합쳐서 생긴 지명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름이 바뀐 지금의 고덕면(古德面)은 ‘옛날 덕풍현이 있던 곳’ 또는 ‘옛 현의 덕스러운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상궁리 양촌공소 인근에는 신리성지, 복자 강완숙(골룸바)과 홍필주(필립보)가 살았던 별라산리(오늘날 고덕면 대천3리 별암마을), 버그내(삽교천) 바로 너머 여사울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성가정상과 표지석. 성가정상은 합덕본당의 수호자인 나자렛 성가정을 상징한다.

1890년 설립된 대전교구 모든 본당의 모태

덕산은 순교자의 땅이다. 정사(1797년)·신유(1801년)·정축(1817년)·기해(1839년)·병인(1866년) 박해 등 다섯 차례 환난을 겪으면서 141명(거더리 교우촌 순교자 중 홍주에 속하는 아랫 거더리 출신을 제외하면 117명)이 순교했다. 이들 중 정산필(베드로)·인언민(마르티노)·이보현(프란치스코)·홍필주(필립보)·김사집(프란치스코)·이시임(안나)·고성대(베드로)·고성운(요셉)·정태봉(바오로)·김조이(아나스타니시아) 복자와 하느님의 종 황심(토마스)이 덕산 출신이다. 또 다블뤼·오매트르·위앵·손자선(토마스) 성인과 강완숙(골룸바) 복자가 덕산에서 살았다. 양촌공소가 있는 거등리 출신 정도문의 어머니가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양촌공소는 내포의 드넓은 합덕평야에 자리하고 있다. 공소 마당에 들어서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김대건 신부 성상을 조각한 한진섭(요셉) 작가의 ‘성가정상’이 있고, 그 옆에 “합덕성당이 이곳에서 시작하다”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진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양촌공소는 합덕본당뿐 아니라 대전교구 145개 모든 본당(2024년말 기준)의 모태이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100여 년에 걸친 조선 왕조 치하의 기나긴 박해가 끝나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1890년 2월 선종하는 바람에 임시 교구장직을 맡은 코스트 신부는 1890년 8월 내포 땅에 2개 본당을 설립했다. 양촌본당과 간양골본당이다. 양촌본당은 충청도 동·남쪽 지역을, 간양골본당은 충청도 서·북쪽 지역을 관할했다.

1883년부터 공주 유구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역을 사목하던 두세 신부가 1888년 양촌공소를 설립했다. 당시 신자가 54명이었다고 한다. 1년 후 1889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퀴클리에 신부가 조선 선교사로 입국하자 양촌공소가 전격적으로 본당으로 승격한 것이다.
지금의 양촌공소는 1949년 페랭 신부가 옛 초가 성당을 헐고 지은 공소 모습 그대로 2017년에 복원한 것이다. 양촌공소 내부.

1899년 합덕으로 본당 옮기며 공소로 남아

코스트 신부가 임시 교구장임에도 불구하고 내포 지역에 본당 2곳을 동시 설립한 이유는 블랑 주교가 생전에 박해로 이 지역의 신앙이 황폐화된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랑 주교는 “중부 지역은 정말 황폐한 상태입니다. 1868년까지 모든 박해를 이겨냈던 내포 공소는 오늘날 그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라며 어떻게든 내포 교회를 재건하고자 온 정성을 쏟았다.

블랑 주교의 이런 바람과 달리 간양골본당 초대 주임 파스키에 신부가 지병으로 프랑스로 귀환함에 따라 간양골은 본당 설립 5년 만에 양촌본당 공소로 흡수되고 만다. 이후 양촌본당 초대 주임 퀴클리에 신부는 더 나은 선교지를 찾아 1899년 합덕으로 본당을 옮겼다. 이 조치로 양촌 역시 본당 설립 9년 만에 합덕본당의 공소가 됐다. 대전교구 모든 본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양촌과 간양골본당은 1899년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합덕과 공세리 본당으로 새롭게 자리했다.

양촌본당 초대 주임 퀴클리에 신부는 최성용(요한) 초대 본당 회장의 옆집 초가를 매입해 성당으로 사용했다. 또 20여 채를 더 매입해 성당 터를 넓혔다. 그는 교리교육뿐 아니라 지역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신학문 교육에도 힘썼다. 고아들을 위한 성영회(聖?會)도 운영했다. 또 주민들이 위생적인 식수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웅덩이에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 지하수를 파서 우물을 만들어 지역에서 가장 깨끗한 물을 마시게 했다.
양촌공소 제대. 벽을 파서 사각형 앱스를 만들어 제단 형태로 꾸미고 옛날에 사용했던 벽제대를 그대로 설치해 놓았다.
퀴클리에 신부가 가져온 ‘십자가의 길 14처 도상’.

2017년 원형에 가깝게 한옥 형태 성당 복원

하지만 양촌성당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을 빙자한 토비들의 습격으로 훼손되고 기물을 도난당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퀴클리에 신부의 인품을 익히 알던 지역 현감은 “선량한 신부를 괴롭히지 말라”고 나무라며 파괴된 성당 복구를 돕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고초를 겪은 퀴클리에 신부는 양촌이 장차 내포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본당을 합덕으로 옮겼다. 그는 합덕에서도 가난한 교우들을 위해 성당 주변 토지를 매입해 그들에게 나눠줘 농사를 짓게 하고 낮은 소작료를 받아 내포 지역에 새로운 성당들을 지어 나갔다.

퀴클리에 신부는 내포 지역 신앙 공동체가 재건된 것을 확인하고는 북만주 간도로 자원해 떠났다. 1909년 용정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그는 화룡·연길 등 간도 서쪽 지역 복음화에 힘썼다. 퀴클리에 신부는 1935년 황해도 매화동성당에서 선종해 성당 뒷산에 묻혔다.

지금의 양촌공소는 1949년 합덕본당 주임 페랭 신부가 낡은 옛 성당을 헐고 새로 지은 한옥 형태 건축물이다. 페랭 신부는 양촌성당과 간양골 사제관 철거 후 쓸만한 목재와 부재를 재활용해 공소를 지었다.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2017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2018년 5월 1일 당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가 축복했다.

공소 가운데에 기둥을 설치해 남녀 회중석을 구분했다. 한쪽 벽에 사각형 ‘앱스’를 만들어 옛 제대를 설치했다. 양쪽 긴 벽면에는 퀴클리에 신부가 가져온 ‘십자가의 길 14처 도상’을 설치해 놓았다. 사제와 복사가 판공성사 때 머물던 방의 기둥과 문틀도 복원했다. 복원 공사와 함께 공소 교육관을 새로 짓고, 회의실과 주방·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뒀다. 이곳은 순례자들을 위한 시설로도 쓰이고 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