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첼스바흐. 중세부터 성모 순례지로 2011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이곳에 사목 방문해 9만 명의 신자들과 함께 성모 찬가를 봉헌했다. 독일 분단 시기에는 동독 땅이었지만 예외적으로 서독 신자들이 순례를 목적으로 방문해 동독의 친척들과 상봉할 수 있어서 ‘전 독일 만남의 장소’ 역할을 했다.
남북이 갈라진 지 80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겨우 몇 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마지막 공식 상봉은 2018년 8월 금강산이었지요. 그로부터 벌써 7년이 지났습니다. 상봉 신청자의 상당수는 고령이 되었고, 통일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듯 죽기 전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은 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은 사정이 조금 나았습니다. 동·서독 사이에 자유로운 왕래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1970년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후 동독은 친척 방문·가족 상봉 목적의 서독 주민 방문을 제한적으로 허용했습니다. 물론 비밀경찰의 감시가 따라붙었지만 서로 만날 수 있는 게 어딥니까. 그런데 서로가 좀더 쉽게, 더 많은 이들이 만나 기쁨을 누리던 예외적인 장소가 있었습니다. 한때 동·서독 주민이 무려 1만 명까지 모이기도 했던 ‘에첼스바흐’입니다.
에첼스바흐 성모 순례 소성당. 1897~1898년에 순례자가 늘어서 기존 목골조 소성당을 허물고 네오고딕 양식의 벽돌 건물로 새로 지었다. 소성당 앞에 베네딕토 16세 교황 방문 기념 브론즈판과 교황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현재 에르푸르트교구 지엠로데본당이 순례 사목을 맡고 있다.
옛 동독 국경지대의 성모 성지
에첼스바흐는 중부 독일 한가운데 튀링겐주 북서쪽, 옛 동독 국경 구릉 지대인 아이히스펠트 지역에 있습니다. 괴팅겐에서 에르푸르트로 가는 아우토반 중간쯤에서 빠져나가면 금방입니다. ‘까마귀가 모여드는 개울’이란 이름대로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가에 라임 나무로 둘러싸인 붉은 벽돌 소성당이 보입니다. 자칫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놓칠 만큼 작습니다.
첫인상은 여느 시골 성당보다 초라해 보입니다. 높은 첨탑도 보이지 않고, 성당 주변에 그 흔한 기념품 가게·카페조차도 없습니다. 바람결에 들리는 새소리, 소 방울 소리, 흙과 풀 냄새가 전부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의 안내센터와 주차장만 이곳이 순례지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곳은 옛 동독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성모 순례지입니다. 독일이 통일된 후 옛 동독 지역을 공식적으로 사목 방문한 교황의 첫 발걸음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2011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독일 사목 방문 중 헬리콥터를 타고 이곳으로 와 9만 명의 신자와 함께 ‘성모 찬가(Magnificat)’를 봉헌했지요.
소성당 측랑의 피에타상. 17세기 초 조각된 목조 피에타상으로 순례의 기원이 됐다. 보통 피에타는 예수님의 몸이 왼쪽으로 눕혀 있지만, 여기서는 오른쪽으로 기댄 자세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에첼스바흐 사목 방문(201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통일 후 베를린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튀링겐과 아이히스펠트 같은 옛 동독 가톨릭 지역을 찾은 것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처음이었다.
신교 지역 한복판에 탄생한 성모 순례지
중세 에첼스바흐에는 시토회 수도공동체 중심으로 작은 마을과 성모 소성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1400년 무렵 마을은 황폐해졌고, 남아있던 소성당과 건물들은 16세기 초 농민전쟁에 휘말려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소성당이 들어서며 순례지로 부활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아이히스펠트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말들이 갑자기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세 번이나 그 자리에 버텼다고 합니다. 이상히 여긴 농부가 그 자리를 파보니, 땅속에서 목각 피에타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피에타상을 모실 소성당이 세워지고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러 에첼스바흐를 찾는 순례자의 발길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으로 주변 작센·튀링겐·브라운슈바이크 등의 제후 지역이 루터교로 바뀌면서, 아이히스펠트 주변의 많은 본당과 마을이 루터교로 돌아섰습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였던 마인츠 대주교가 통치하던 이곳만은 끝까지 가톨릭으로 남았지요.
1575년 마인츠 대주교는 인근 하일리겐슈타트에 예수회 학교를 세워 본격적인 반종교개혁을 시작합니다. 예수회 신부들은 강론과 신앙 교육·성모 신심 장려를 통해 농민전쟁의 혼란 속에 신교로 돌아섰던 주민들을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17·18세기에 들어서면 에첼스바흐를 비롯해 휠펜스베르크 성산 등 여러 성지가 하나의 순례망을 형성합니다. 주변 본당들은 해마다 성지를 찾아 성체거동을 했고, 그 덕분에 아이히스펠트는 ‘신교 튀링겐 한복판의 가톨릭 섬’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1802년 나폴레옹 시대의 영토 재편 속에서 마인츠 선제후령은 세속화로 사라지고, 이곳은 프로이센 왕국에 편입됩니다. 가톨릭 다수 지역이 이제는 신교 군주가 다스리는 프로이센의 땅이 된 것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소련 점령지와 동독 공산 정권 아래로 들어가 다시 적대적인 정치 체제를 견뎌야 했습니다. 국경과 정권·이념의 색깔은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에첼스바흐를 중심으로 이어진 신앙과 순례 전통만은 끊기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네오고딕 양식의 본랑. 주 제대의 중앙 스테인드글라스엔 성모 승천이, 양옆의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창에는 14인의 구난 성인이 묘사되어 있다.
분단의 상처를 품은 희망의 공간
소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넓고 밝은 공간이 펼쳐지는데, 곳곳에 위로와 희망의 모티프가 가득합니다. 단아한 주 제대 뒤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주보인 성모 승천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순례지의 기원이 된 피에타상은 소성당 남쪽 측랑에 모셔져 있습니다. 농민전쟁과 30년 전쟁, 흑사병과 두 차례 세계대전, 동서독 분단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살던 이들이 피에타상 앞에서 눈물과 함께 위로를 청해왔지요.
성당 문 위로 성모님의 중재를 그린 반원형의 프레스코화도 인상적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네 기수인 전쟁·기근·역병·죽음이 말 위에서 질주하고 있는데, 천상의 백마를 탄 그리스도께 우리를 지켜주십사 전구하는 성모님의 모습은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성당 밖 라임 나무 그늘에 앉으니, 상봉으로 기뻐하던 독일 주민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철의 장막은 굳건했지만, 이곳만은 성모님의 보호 아래 동·서독을 잇던 숨길이었습니다. 갈수록 남남이 되어가 버리는 현실 속에서 우리도 그때 그들처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순례 팁>
※ 괴팅겐-에르푸르트 아우토반(A38)에서 Heilbad Heiligenstadt 출구로 나와 ‘Wallfahrtskapelle Etzelsbach’ 표지판 따라 이동. 하일리겐슈타트역까지 간선열차가 다닌다. 역에서 택시 이용(10㎞ 10분). 순례 소성당 인근에 정보센터와 주차장이 있다.
※ 성모 마리아 관련 축일에만 미사가 있다. 6월~9월 23일 주일 오후 5시 마리아 찬가 봉헌.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후 둘째 주일에 말·가축 순례 및 축복 전통.
※ 혼자 가시기 힘든 분을 위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6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참고. 문의 및 신청 :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