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목소리, 실존적 결단 이끄는 결정적 계기

(가톨릭평화신문)
양심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쉬네이데시스(συνε?δησις)’는 어원적으로 ‘함께’라는 뜻의 ‘쉰(συν)’과 ‘안다’라는 뜻의 ‘오이다(ο?δα)’가 결합된 단어로, 라틴어 ‘꼰쉬엔찌아(conscientia)’가 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직역하면 양심은 ‘함께 안다’라는 뜻으로 결국 ‘확실하고 견고한 내적 인식의 근거’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견고한 지식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것’, 즉 ‘다이모니온’(δαιμ?νιον)이라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사형까지 당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양심을 이성적 자기 인식에 기반한 도덕적 확신과 자각된 지혜로 이해한다. 도덕적 판단과 행위의 기반이 되는 스토아 철학의 양심 개념은 이후 그리스도교에 수용되고 발전한다. 양심은 본성적으로 선을 지향하는 영혼의 경향성으로 인간적인 자기 행위의 도덕적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런 양심의 근거는 이성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선한 하느님이다. 양심이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는 한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반면, 신에 근거할 때 신비로운 모습을 띠기도 하며, 어느 때는 경직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계몽 시대의 양심은 철저하게 신으로부터 분리되며, 오로지 개개인의 이성에 기반한 자율적 판단 능력으로 이해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양심을 철저하게 외면적이고 타율적인 심급에서 내면적이고 자율적인 심급으로 전환한다. 양심은 이성이 자기 입법을 근거로 하는 ‘내면의 법정’과 같다. 종교는 더는 도덕적 판단을 위한 객관적인 인식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이성에 따라서 판단할 뿐이다. 물론 칸트는 도덕 실천을 위한 삶의 규제 원리로서 종교를 요청한다.

나치에 끝까지 저항했던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에게 양심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단순한 ‘현존’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 ‘실존하도록 요구하는 내면의 부름’이다. 이때 양심의 부름은 심판자의 목소리도, 신의 목소리도, 어떤 객관적인 도덕법칙을 대변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오히려 양심은 단순한 현존으로부터 자신의 본래적 실존이 될 것을 요구하는 ‘절대 의식’이다.

이런 실존을 붙드는 절대 의식은 역설적으로 자기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실존적 현기증과 위기의 순간에 양심의 목소리로 나에게 개시된다. 절체절명의 실존적 위기의 순간에 이 양심의 목소리는 나의 실존적 결단을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 결단은 존재 전체를 걸고 이루어지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근원적 선택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이런 자기 결단 역시 불확실할 뿐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마저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이다. 이런 인정이 바로 우리의 진정성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양심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착각과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심 앞에서 부단히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검증하는 일은 진정한 용기이자 실존이 되는 길이다. 이런 야스퍼스의 양심은 그릇된 권력과 법 앞에서 무뎌진 양심으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치유를 위한 경종의 목소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