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향숙 평화칼럼] 활자의 숲에서 만나는 ‘퍼펙트 데이즈’

(가톨릭평화신문)

“다시 더러워질 텐데, 왜 이렇게까지 닦는 거죠?”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동료 청소부가 주인공에게 던진 이 별스럽지 않은 물음이 지난밤 내 가슴을 오래도록 두드렸다. 도쿄의 공중 화장실을 청소하는 주인공 히라야마는 이 질문에 그저 미소만 지었지만,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나의 지난 시간들, 그리고 2026년에 앞으로 마주할 시간이 그 질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지난 시간 동안 나는 ‘권태’와 꽤 지루한 싸움을 벌여왔다. 한때 월간지 기자로 현장을 누비고 단행본을 기획하며 맛보았던 짜릿한 성취감은 어느새 추억이 되었다. 지금 내 앞에는 2000년 전 고문서들의 숲이 펼쳐져 있고, 나는 그 숲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아 배치하고 오·탈자라는 잡초를 뽑아내는 ‘디지털 시대의 필사생’으로 앉아 있다.

은퇴했을 나이에 현역이라 부러움도 사지만, 안경을 고쳐 쓰고 모니터 속 깨알 같은 활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노라면 가끔 헛웃음이 난다. 이미지 하나, 조사 하나, 어미 하나를 찾고 다듬기 위해 수없이 검색하고 같은 문장을 무한 반복해서 읽는 일. 이것은 어떤 성취감보다는 묵묵한 인내를 요구하는 고행에 가깝다. 사람들은 ‘갓생’을 위해 헬스장이니 러닝이니 부산한데, 나는 마우스 휠을 굴리며 활자 속을 하염없이 걷는 ‘디지털 유산소 운동’으로 하루를 채운다.

지루함이 차오를 때면 나는 히라야마를 떠올린다. 누가 보든 말든 변기의 보이지 않는 안쪽까지 거울을 비추어 가며 닦아내는 그에게 노동은 ‘청소’가 아니라 ‘수행’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빗자루 소리에 잠을 깨고 똑같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일터로 가면서도, 그는 나뭇잎 사이로 순간순간 비치는 햇살 ‘코모레비(木漏れ日)’를 발견하고 아이처럼 기뻐한다.

영국 작가 G. K. 체스터턴은 “하느님은 매일 아침 해를 띄우실 때마다 지루해하기는커녕, 마치 어린아이처럼 ‘한 번 더!’를 외치고 계실지 모른다”고 했다. 반복을 지루해하는 건 늙고 지친 인간뿐, 영원히 젊으신 하느님께 반복은 곧 성실함이자 생명력 넘치는 리듬이라는 통찰이다. 그렇다면 나의 지루함은 일의 무미함보다 감동을 모르는 메마름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주님 세례 축일인 오늘의 복음 속 예수님께서는 요르단강으로 내려가신다. 죄 없으신 분께서 혼탁한 이 세상의 강물 속으로, 그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가 잠기신다. 나 역시 매일 아침 이 디지털 활자의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눈이 시리고 어깨가 결리는 지난한 반복의 강물이지만, 이 물속에 잠겨야만 비로소 건져 올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들이 있음을 안다.

내가 찾은 이미지 하나, 바로잡는 오·탈자 하나가 단순한 픽셀이 아니라 누군가의 영혼을 적실 물방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하느님께 다다르게 할 징검다리일지도 모른다. 본문과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문장들이 질서를 잡아 모호했던 의미가 명징하게 드러나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순간, 그것이 바로 나의 ‘코모레비’다.

새해라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나의 2026년 역시 이미지 찾고 조판하고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고민하는 고독한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단조로움을 ‘허무’라 부르지 않고 ‘퍼펙트 데이’라 부르려 한다. 남들이 보지 않는 행간을 닦는 내 손길 덕분에 세상이 조금은 더 깨끗하고 온전해진다고 믿으면서. 화면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하느님 사랑의 윙크라고 여기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녀다.” 이 한마디면, 이 반복되는 일상도, 이 지독한 편집의 숲도 충분히 근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