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와 가난 견디며 신앙 빚어낸 옹기 교우촌, 구룡리공소

(가톨릭평화신문)
당진본당 구룡리공소 전경.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이겨내지 못해 초석이 내려앉고 건물이 비틀어졌지만 여전히 하느님 사랑의 새 바람을 일으키는 든든한 신앙의 못자리다.

진산사건 이후 당진 땅에 스며든 신앙의 씨앗

충남 당진에는 1791년 진산사건 이후로 북쪽 해안지대와 서남단 산간 지역 곧 당진군 순성면·면천면 일대에 교우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삽교천을 중심으로 내포 지역 동서 천변 주위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터를 잡은 구룡리 교우촌 역시 당진에서 서산시 운산으로 가는 구룡고개 인근 산간에 자리한다. 마을 지형이 마치 구렁이 같다 하여 ‘구렁’이 ‘구룡’으로 변해 구룡리(九龍里)라 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1901년 당진군 이배면 구룡리에 사근절·사기점(대화)에 공소가 설립됐다. 이 해 두 공소 현황은 사근절 54명·사기점 130명 신자가 있었다. 두 공소 신자들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 대부분 옹기업에 종사했다.

당진 구룡리 옹기 교우촌 신자들은 부지런하고 신앙생활, 특히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관해 열심이었다. 먼저 이들의 근면함을 보자. 구룡리 신자들은 자신들의 옹기를 더 쳐주는 사람들을 찾아 바닷길을 이용해 황해도까지 갔다. 이곳 수익이 서울·경기 지역보다 훨씬 좋았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합덕본당 제7대 주임 페렝 신부는 구룡리 신자들이 다른 공소와 달리 신앙생활에 열심하고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도 모범적이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교육할 줄 모르고 교리를 가르칠 줄을 더욱 모릅니다. 두곡리·간양리·수철리·봉소리·구룡리공소들을 제외하면 13세 된 아이들이 아직 영세문답을 배우고 있고, 고해와 성체 문답을 배운 아이 중에서도 이 큰 성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조차 모르고, 또 성사 받을 원의가 조금도 없는 어린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1922년 페렝 신부 보고서)
구룡리공소 내부. 하얀 회벽과 나무마루가 단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페렝 신부의 이러한 칭찬에도 구룡리 옹기 교우촌 신자들은 1920년대 후반 들어 큰 위기를 맞는다. 옹기를 빚을 점토를 가까운 곳에서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옹기 제작에 필요한 점토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가족이 덕산 부근으로 떠났고, 파산한 노름꾼 중 강원도의 어디론가 떠난 자들도 있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마 그 지방의 명예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 사근절과 대화리(구룡리)공소는 매년 감소하고 있습니다. 점토가 다 떨어졌고 가까운 곳에도 없습니다.”(「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401~405쪽 참조)

이런 이유로 신자 수가 급속히 감소하자 1929년 전후로 구룡리 옹기 마을 공소들은 신자 수가 제일 많던 사기점, 곧 대화공소로 편입돼 ‘구룡리공소’가 됐다.

구룡리공소 신자들은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초대 회장 심증오 바오로는 전교 활동에 힘썼고, 2대 회장 전치삼 바오로는 공소 건립에 헌신했다. 전 회장과 공소 신자들은 성미 주머니를 신자들 집집이 나눠줘 주일마다 쌀을 모아 그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키워 내다 팔아 소를 사고 또 그 소를 내다 판 돈으로 공소 대지를 마련했다. 1926년 그 땅에 약 66㎡ 규모의 13.5칸 한옥을 지어 9칸은 공소로, 3칸은 방으로, 1.5칸은 툇마루로 사용했다.

신자들의 열심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1949년 당진본당 교세를 보면 구룡리공소 신자 수는 215명으로 본당 신자 220명보다 불과 5명이 적지만 영성체와 고해성사·판공성사 수는 본당에서 가장 많고 그 차이가 2배 이상이나 됐다.
구룡리공소 제대. 나무 제대가 흰색 페인트로 마감돼 원형을 알 수 없어 아쉽다.

구룡리공소에서 끌려간 코르데스 신부 순교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0일 북한 인민군이 당진을 점령했다. 이날 밤 당진본당 제4대 주임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가 내무서로 끌려갔다. 당진성당은 민주청년동맹 사무실로 징발됐다. 제대는 업무용 책상으로 사용됐고, 주민들은 매일 성당에서 열리는 집회에 강제 동원됐다.

심문을 받고 다음날 아침 풀려난 코르데스 신부는 손 마르티나 식복사 주도로 항곡리공소 김광수 회장 집에 3일간 피신해 있다가 구룡리공소 사근절 외진 곳에 있는 송유문(요셉)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코르데스 신부는 은신 중에도 구룡리공소에서 신자들과 함께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낮에는 고해성사를 주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8월 14일 이전 어느 날 당진 내무서원들이 구룡리공소를 습격했다. 내무서원들은 신자들을 잡아 공소 회장 집으로 끌고 와 “신부가 있는 곳을 대라”며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코르데스 신부는 “나 하나 때문에 우리 교우들이 저런 폭행을 당하면 되겠느냐”며 “공소에 가 있을 테니 잡으러 오라”고 연락한 후 구룡리공소로 갔다.

코르데스 신부는 구룡리공소에서 기도를 바친 후 내무서원들에게 잡혀 당진으로 끌려가 나흘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합덕본당 페렝 신부 등과 대전형무소로 끌려간 후 그해 9월 23~26일 사이 피살돼 순교했다. 코르데스 신부는 현재 시복 대상자로 선정돼 있다. 

산업화로 쇠락했지만 살아 있는 신앙 못자리

이러한 고난 속에도 구룡리공소는 1964년 신자수 317명이 될 만큼 성장했지만 1970년대 산업화로 인한 이주로 쇠락해 지금은 공소 기능을 다했다.

서울대교구 고 전용선(요한 사도) 신부와 대전교구 성사전담 이상룡(필립보)·이상호(요한 세례자) 신부가 구룡리공소 출신이다.

충남 당진시 도동길 44-9에 자리한 구룡리공소는 1947년 개축한 한옥 건물이다.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돼 있고, 공소 옆 마당에는 성모상이 설치돼 있다. 단아한 청기와 한옥과 소박한 성모상이 하느님을 찾는 낯선 순례자들의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한다.

공소 내부는 더욱 단아하다. 하얀 회벽과 목조 마루가 공소 안 찬 공기만큼 티 없이 맑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제대 뒷벽은 샌드위치 패널을 대고 더는 비틀어지지 말라고 세 가닥 인장 케이블을 설치해 놓았다.

제단과 회중석은 높낮이 구분 없이 평평하다. 다만 제대 아래에 단을 만들어 놓았다. 나무 제대는 흰색 페인트로 마감돼 있다. 그 위에 십자가와 촛대 2개가 소박하게 놓여있다. 이 나무 제대가 코르데스 신부가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가기 전 구룡리공소 신자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던 그 제대라면 지금 원형 그대로가 아닌 것이 너무 아쉽다. 제대 뒷벽 양쪽 기둥에는 루르드 성모상과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요셉 성인상이 있고, 그 아래 성모화와 김대건 신부 성화가 걸려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양쪽 벽에 다소 큰 창이 있다. 이 창들 또한 개축하면서 편의에 따라 변형된 듯하다. 양쪽 벽에는 빛바랜 십자가의 길 14처 도판이 설치돼 있다.

대전교구 당진본당 구룡리공소는 조선 왕조·동학 농민·일제·공산군의 박해와 무신론이 만연한 현대 사회 속에서 신앙을 지켜내고 이어온 삶의 자리다. 비록 지금은 쇠락해 공소로서 면모를 다하지 못하지만 구룡리공소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세상에서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도록 하는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켜 주는 신앙의 못자리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