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봉 주교, 한국 선교 여정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톨릭평화신문)
두봉 주교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14일 장례미사를 마친 뒤 영정과 함께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대성전 밖으로 운구되고 있다.

예수님께 반해 이역만리 한국에서 71년간 ‘기쁘고 떳떳하게’ 살며 착한 목자의 본보기가 된 영원한 선교사. 언제나 가난한 삶을 지향하며 어렵고 소외된 이들과 동행해온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의 ‘작은 예수’. 한국을 지극히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 교회 산증인인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레나도, René Dupont) 주교가 4월 10일 오후 7시 47분 선종했다. 향년 96세.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6일 뇌경색 시술을 받고 안동병원에 입원 중이던 두봉 주교는 10일 하느님 품에 안기기 전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고해성사를 준 교구 사무처장 김종섭 신부의 “후련하시지요, 이제 아무 걱정 없습니다”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날 오후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두봉 주교는 김 신부에게 힘겹게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성사”라고 말했다. 고해성사에 임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안동교구가 전한 고인의 마지막 순간으로,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와 사제들의 마지막 기도 속에 하느님 품에 들었다. 두봉 주교는 병실을 지킨 사제들 앞에서 힘겹지만, 다시금 늘 행했듯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어 보였다고 한다. 끝까지 감사의 표현을 전한 것이다.

장례미사는 14일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거행됐다. 권 주교는 강론에서 “두봉 주교님은 여덟 가지 참된 행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곧 진복팔단(眞福八端)을 가장 좋아하셨다”며 “무엇보다 첫 번째 참된 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를 특별히 마음에 새겨 몸으로 실천하며 사셨다”고 말했다. 한국 주교단을 비롯한 1500여 명 신자들의 작별 인사를 받은 고인은 경북 예천에 있는 교구 농은수련원 내 성직자 묘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두봉 주교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나 교구 대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953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 12월 한국에 입국한 두봉 주교는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 교구 상서국장과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을 역임했다.

1969년 5월 29일 안동교구가 설정되자 첫 교구장에 임명, 7월 25일 주교품을 받고 착좌했다. 이후 21년간 목자로 헌신하며 교구 기틀을 다지고, 지역 발전과 농민 인권 신장에 힘썼다. 상지여자전문학교(현 가톨릭상지대학교)와 상지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여성의 교육 기회 확대에 이바지했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영주 다미안의원)과 신체장애인 직업훈련원 건립을 지원하는 등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업도 펼쳤다.

1990년 두봉 주교는 “한국 교회는 한국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정년보다 14년 일찍 사목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경기 고양 행주공소(현 의정부교구 행주본당)와 경북 의성 봉양면에 머물러 손수 농사를 지으며 소탈한 삶을 살았다. 아울러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피정과 강연·방송 출연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주님 사랑을 실천하고, 신자·비신자 가리지 않고 지역 공동체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기쁘고 떳떳하게 여생을 보냈다.

두봉 주교는 지역 사회 발전에 헌신한 공로로 2019년 특별귀화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또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과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