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흑산성당 문화재청 문화재 등록 예고

(가톨릭평화신문)
▲ 흑산도에서 구한 몽돌로 지은 흑산성당 측면 모습



광주대교구 신안 흑산성당이 최근 문화재청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문화재청은 “신안 흑산성당은 우리나라 서남해의 최남단에 자리한 흑산도에 천주교가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자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낙후되었던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던 점에서 종교적 가치와 지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아울러 “섬에서 구한 몽돌을 건축 재료로 활용하고 독특하게 구성된 정면 중앙부 석조 종탑 등이 건축사적 측면에서 의미가 크므로 등록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신안 흑산성당은 1957년 성 골롬반외방선교회의 지원으로 항구에서 가까운 언덕 위에 부지를 마련한 후 착공, 이듬해 11월 봉헌했다. 문화재청은 30일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흑산성당을 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다.

흑산도와 천주교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한 후 흑산도로 유배를 온 정약전(1758~1816)이다. 정약전은 1779년 주어사 강학회 회원으로 천주교를 연구한 한국교회 창설 주역 중 한 명이다.

정약전은 흑산도 인근 우이도에서 1806년까지 생활하다 1807년 흑산도로 건너와 섬 남쪽 사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시작한 1800년대 초반에 천주교가 전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배자들은 대개 유배지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대과(大科)에 급제해 승정원 부정자(副正字)까지 지낸 ‘지체 높은 양반’ 정약전은 낮은 계층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어부들은 서로 싸우면서 정약전이 자신의 집에 있어주길 바랐다고 한다.

1902년, 산정동본당 주임이었던 드예(A.Des hayes,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우이도를 사목방문한 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모든 사람이 그를 겸손과 정결함의 모범으로 이야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도 사리 마을 어르신들은 정약전을 “약전 할애비”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드러낸다. 또 어르신들 사이에서 “우리 마을에 굉장히 훌륭한 분이 살았다더라”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이상도 기자 raelly1@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