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유해 진정성 입증

(가톨릭신문)

1800년 충남 해미에서 순교한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유해에 대한 진정성이 입증됐다. 진정성 확인을 청하는 대전교구 삽교본당 주임 최일현(루카) 신부의 청원서가 대전교구장 김종수(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제출된 지 1년 2개월만이다. 


김종수 주교는 11월 1일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유해 진정성에 대한 교령’을 발표하고,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산 9-6번지에 소재한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유해에 대한 교회법적 인준을 위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총대리 한정현(스테파노) 주교를 주교 대리인으로 하는 법정을 구성했다"며 “주교 대리인은 관계자들과 함께 무덤을 발굴하고, 과학적 검증을 거친 전문가들의 의견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그 진정성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어 "이 모든 과정을 확인한 본 주교는 위 장소에서 발굴된 유해가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유해라고 선언하며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고 선언했다.


대전교구는 지난 6월 1일 주교 대리인을 포함한 법정 구성원과 전문가 등 55명이 입회한 가운데 시성부 훈령의 규범을 준수해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산 9-6번지 무덤을 개묘했다. 


개묘 결과와 이후 자문 의뢰에 따라 작성된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유해의 진정성 확인을 위한 재판’ 판결문(10월 24일자)에 따르면, 해당 무덤 소재지는 교동인씨 족보상에 기록된 매장 방향인 북서에서 남동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등 인언민의 피장지와 동일한 것으로 판단됐다.  이에 더해 복자의 후손과 인근에 거주해 온 주민이 ‘해당 산소는 봉분과 사성이 크고 또렷했으며 관리가 잘 되었다’, ‘교회 다니다 돌아가셨다거나 예수 믿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해미에서 돌아가셨다’ 등으로 밝힌 구술은 복자의 순교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과학적 검증을 위한 감식에서는 유골의 토양화 진행 정도가 심해 유전자 분석을 통해 개인식별 정보의 확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다만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검사에서 추출한 정보를 통해 피장자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높은 빈도로 발견되는 ‘D4’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아울러 의학적 감식 결과, 발굴된 유골의 보존상태는 풍화 정도가 가장 심한 4단계 또는 5단계에 해당하므로 온전한 형태의 뼈 모양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부 잔존 유해를 통해 합리적인 추론으로 결과를 도출한 결과 피장자의 유해는 단일 개체로 사망 무렵 나이는 20세 이상에 키는 165±4cm 정도의 성인 남성으로 추정했다. 이와 관련 지난 9월 26일 열린 진정성 확인을 위한 재판에서 의학전문가 송창호 씨는 유해의 경화 처리 후 상태 확인 결과, 사망 무렵 나이를 40~50세 이상일 것으로 증언했다.


유골 자체의 과학적 감식 외에도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목관의 연륜 연대 측정 결과, 목관 시료 최외곽 나이테 절대 연도는 1761년으로, 해당 목부재는 18세기 후반에 벌채돼 목관 제작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고됐다.


무덤이 소재한 용동리 산 9-6번지가 교동 인씨 선영이라는 점에 대해 발굴에 참여한 역사전문가들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장례의례에 비춰 복자가 선산에 매장됐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인언민 마르티노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성실히 보존, 관리돼 왔으며 순교자가 묻힌 특별한 곳으로 인식됐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문헌과 구전 증언이 일치하고 무덤의 위치와 매장 방향 등이 고고학적으로 정확히 입증됐으며 무덤 발굴 결과 또한 문헌 및 구전 증언의 진정성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줌에 따라 판결문은 “본 법정은 2024년 6월 1일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산 9-6번지에서 발굴한 순교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유해에 대해 거룩한 교회의 규정을 준수한 가운데 충실히 검토한 결과 그 진정성이 입증됐음을 확인하고 선언한다”고 밝혔다.


복자 인언민 묘소 진정성 확인 절차는 청원 이후 신속하게 진행됐다. 최일현 신부는 지난 2023년 9월 20일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추정 묘소 발굴에 관한 진정성 확인과 교회법적 인준을 위한 청원서를 김종수 주교에게 제출했다. 김종수 주교는 이 청원을 수락하고 ‘유해 발굴 및 이전’을 추진하기 위한 교구장 청원서를 교황청 시성부에 제출, 올해 3월 20일자 답신을 통해 동의를 얻었다. 


김 주교는 이에 따라 4월 29일 ‘유해 발굴 및 이전’에 대한 허가 교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교구 총대리 한정현 주교를 주교 대리인으로 임명해 이후 진행되는 모든 절차에 관한 권한을 위임했고, 검찰관으로 이의현(베드로) 신부, 공증관으로 김솔(노엘) 신부를 임명해 법정을 구성했다.


대전교구는 지난 9월 26일 교황청 시성부 훈령 ‘성인들의 어머니’ 부칙 제2조 제1항과 제2항에 따라 유해의 진정성 확인에 관한 사실 심리를 위해 법정을 개정했고 10월 24일 판결문을 발표했다. 




◆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인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남겨 두었으며, 얼마 뒤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전혀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 마르티노에게 가져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인언민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 *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124위 복자 약전에서 발췌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