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칼럼] 좀 쉬었다 일해도 돼!

(가톨릭평화신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 가운데 표도르의 둘째 아들 이반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이반은 지적 오만에 빠진 무신론자다.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그가 어느 날 동생 알료사에게 털어놓은 속내가 인상적이다.

“나는 살고 싶어.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어. 내가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더라도, 봄이면 싹을 틔우는 끈적끈적한 잎사귀들이 소중하고, 파란 하늘도 소중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이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해.”

우리는 이 지상 순례를 마치는 순간 무엇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할까.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기에 무어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름밤 부나방 떼가 불빛을 보고 달려들듯 너나없이 달려들어 차지하려고 발버둥 치는 부와 명예, 권력은 아닌 듯싶다.

지인들의 임종을 지키면서 돈을 더 벌지 못해서, 혹은 명예를 누리지 못해서 아쉽다고 탄식하는 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개 가족 간의 사랑이나 언젠가 다녀온 즐거운 여행, 친구와의 우정 같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다. 지적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이반조차도 고개만 쳐들면 볼 수 있는 나뭇잎과 하늘,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이 너무나 소중해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일에 파묻혀 그토록 소중한 것들을 그냥 지나친다.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삶과 노동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다. 일에 파묻혀 죽을 둥 살 둥 용쓰는 그런 부류의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공허한 ‘철학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면 노동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그런 일개미형은 휴일의 자유도 누릴 줄 모른다. 그 자유는 불안한 낭비일 뿐이다. 그런 불안을 이용해 번창하는 것이 거짓희망으로 위안을 주는 값싼 힐링 프로그램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몇 해 전 회자된 영화 ‘곡성’의 명대사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는 소중한 것을 바닥에 줄줄 흘리면서 내달리기만 하는 사회상에 대한 반동(反動)이었다.

이반의 고백은 거꾸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생명력을 내뿜는 나뭇잎과 눈부시게 파란 하늘, 그리고 좋은 사람은 수치로 측정할 수 없다. 이런 소중한 것들은 GDP(국내총생산)와 GNP(국민총생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수박 한 조각 베어 무는 행복,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따스한 시선, 놀이의 즐거움 등 진정 소중한 가치는 거기에 모두 빠져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0.1% 등락에 일희일비하며 그 수치에 목을 매고 있다.

여름 휴가철이 시작됐다. 다들 사는 게 힘들다고 아우성이지만 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금처럼 배부르고 풍요로운 시기는 없었다. 그러니 좀 쉬었다가 일해도 된다. 쉬면서 소소한 일상의 담백한 맛, 어떻게 보면 세상 사는 맛의 근원인 그 맛을 찬찬히 느껴보길 권한다. 그 담백한 맛을 아는 사람은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잠을 뒤척이지 않는다. 생활고에 좌절해 극단적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쉬는 동안 ‘날 수 셀 줄 아는 지혜’(시편 90,12)도 청해 보면 어떨까. 내게 허락된 날 수가 다한 날에 과연 무엇을 그리워할까. 그 지혜를 갖고 있다면 휴가지에서 맛보는 소소한 행복은 배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