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외교적 승리를 기다리며(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가톨릭평화신문)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전선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저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 올린 글이다. 그리고 성웅은 이 12척의 배로 1597년 전라도 명량해전에서 300척의 위용을 자랑하던 왜군을 물리쳤다.

우리 사법부의 강제징용 개인 배상 판결을 정부가 막지 않은 것은 1965년 한일협정 위반이라고 항의해 온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작하였다. 일본 기업이 우리나라에 반도체산업에 필수적인 원재료를 수출하는 것을 규제하고, 더 나아가 화이트리스트(White List) 국가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할 것이라고 한다. 이럴 경우 우리가 일본에서 전략물자를 수입할 때 지금까지와는 달리 개별 심사를 받아야 한다.

우리 정부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 12일 ‘전남 블루 이코노미 경제 비전 선포식’에서 “전남의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며 사전에 배포된 연설문에 없던 말로 일본의 공세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19년 판 신명량해전이 시작된 느낌이다.

중동에도 이와 비슷한 근대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만제국은 1920년 승전 4개국, 즉 영국,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와 프랑스 세브르에서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여야만 하였다. 중동에서 동유럽까지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던 오스만제국은 기존에 통치하던 땅을 모두 빼앗겼을 뿐 아니라 수도 이스탄불마저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군인 수는 5만 700명을 넘지 못하고, 공군은 유지할 수 없으며, 해군은 단 7척의 범선과 6척의 어뢰선만 가질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처럼 오스만제국도 13척의 배로 자국 영해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해협을 통제할 권리를 상실하였다. 해협은 국제사회가 관리하고, 항구는 자유항으로 개방되었으며, 군과 관련된 사항은 모두 승전국의 통제를 받아야만 하였다. 국가의 주권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말 그대로 오스만제국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국을 정리한 인물이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rk)다. 군인이었던 그는 쇠약한 오스만제국과 일일이 간섭하는 승전국들을 대상으로 실로 이순신 장군처럼 열정적인 애국심으로 터키를 지켜냈다. 세브르조약을 거부한 그는 승전국들과 다시 1923년 스위스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었다. 이른바 로잔(Lausanne)조약이다.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옛 영토를 모두 포기하는 대신 오늘날 터키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되찾았다. 훗날 아타튀르크는 로잔조약을 “오스만 역사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교적 승리”라고 자평하였다. 오늘날 터키의 영토를 온전히 지켰고, 재정권을 완전히 되찾았으며, 해협 통제권도 회복하였다. 에게해와 흑해 사이 해협은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으나, 전시에는 적선의 통행을 막을 권리를 터키가 갖게 되었다.

시공간의 차이가 있고, 역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세브르조약에 분노했던 터키인들의 마음이 요즘 자꾸 떠오른다.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기술 자립의 길이 아직은 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힘을 냈으면 좋겠다.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켰던 성웅의 의지를 우리 국민이 보여주길 바라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교적 승리”라는 말이 언론매체에 쏟아지는 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상상하며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