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어른은 진보다] 가난과 싸울 것인가, 가난한 사람과 싸울 것인가

(가톨릭평화신문)


가난은 괴롭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가난은 힘들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가난 앞에서 영혼마저 망가진다. 그런 가난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애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가난을 탈출하려 한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가난했다. 너 나 없이 가난했기에 상대적 박탈감은 지금보다 덜했을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자식들까지 그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다. 먹고 싶은 것 참고 입고 싶은 것에 눈길 주지 않으며 당신 대에서 가난을 끝내고 싶었다. 그리 큰돈도 아닌 기성회비조차 제때 내지 못하면서도 자식들을 끝까지 학교에 떠밀어 보낼 만큼 ‘뻔뻔했다.’ 배우지 못해서 가난하다는 걸 알기에 자식들은 어떤 경우에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그렇게 버텼다. 그리고 그 덕에 지금 우리는 이만큼 풍족하게 산다.

가난을 일부러 선택할 사람은 없다. 천성이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구제불능 성향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부자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그 꿈을 쉽게 이루게 하지 않는다. 죽어라 뼈 빠지게 일해도 평생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 앞에서 절망한다. 오죽하면 많은 젊은이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며 포기할까. 게을러서 가난한 게 아니라 구조적 모순과 한계 때문에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줄여주고 더 낫고 많은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게 제대로 된 사회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자리를 마련하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일자리도 빼앗고 변변하지 않은 일자리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후려치는 일도 빈번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는커녕 얄팍한 지갑마저 털어서 자신의 배를 더 채우려는 탐욕조차 질책하지 않는 사회는 이미 크게 병든 사회다.

제대로 된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가난’과 싸워야 한다. 수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중산층이라 착각하기 때문인지 가난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심지어 사회주의자라고 몰아세운다. 이제는 ‘빨갱이 타령’이 통하지 않으니 사회주의 운운한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들먹인 게 상대 정당이 집권하면 사회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비열하고 저급한 캠페인이었다. 그게 통한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가난으로의 하향 평준화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걸 뜻한다. 미국이 그럴진대 대한민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다 이 지경으로 천박해졌는지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조차 버거운 시대가 되었다. 가난과 싸우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건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복음은 단순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더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라고 격려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인격과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서로 증오하지 않으며 용기를 주며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는 공동체 정신을 강조한다. 그냥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축복이 아니다. 오로지 그것만 갈구하는 신앙은 값싸고 천박한 믿음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지금 우리의 신앙은 내게 주어질 행운과 물질적 축복에만 매달린다. 정작 가난을 낳을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신앙은 관념이 아니다. 성경 달달 외고 미사 참여 의무에 충실하며 공허한 기도를 쏟아내는 게 아니다. 신앙은 실천이고 복음은 그 실천의 강령이다. 가난과 맞서 싸워 무찔러야 한다. 그게 신앙의 의무이고 교회의 소명이다. 구조적으로 공고한 가난을 만드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가난과 싸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는 게 바로 사탄이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