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무엇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가톨릭신문)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이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력존엄사’는 얼핏 듣기에는 조력을 받아 존엄하게 죽는다는 의미처럼 들리지만, 실질적으로는 의사의 조력을 받아 자살하는 행위, 즉 의사조력자살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콩을 팥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언어의 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사조력자살을 존엄사로 부르게 된 배경은 1972년 미국 오리건주 주지사였던 톰 맥콜(Tom McCall)이 이 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시민과 의회의 반발을 줄이고 지지를 얻기 위해 ‘존엄사’라는 표현을 전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결국 오리건주는 의사조력자살을 존엄사, 자비사 등으로 의미를 포장한 결과, 1994년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에 성공했고 1997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연명의료중단 및 유보’를 존엄사 또는 소극적 안락사로 언론이 보도하면서 ‘존엄사’라는 용어에 대한 혼란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연명의료중단결정의 시행을 곧바로 죽음과 동일시하고,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하더라도 환자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의료행위와 기본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아가 2022년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의사조력자살을 안락사의 한 형태이자 존엄사로 간주하는 표현까지 혼용되기 시작했고, 그 오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의 혼용은 단어의 본래의 의미를 흐릴 뿐만 아니라, 생명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마저 왜곡시킬 수 있는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2024년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미래 사회 대비를 위한 웰다잉 논의의 경향 및 과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82%가 조력존엄사로 표현되는 의사조력자살에 찬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사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국민들이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서비스” 1~5순위로 첫째 생애말기 기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통증 완화, 둘째, 생애말기 환자의 치료 비용 지원, 셋째, 생애말기 환자 및 가족의 심리 및 정서적 지원, 넷째, 집에서 받을 수 있는 생애말기 의료 돌봄 강화, 다섯째, 생애말기 기간 동안 받는 의료 서비스의 품질 개선 등을 꼽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이 신성하며, 누구도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대 의학은 대부분의 통증을 충분히 완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많은 이들이 생의 말기에는 돌봄과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의사조력자살과 안락사를 ‘존엄사’로 포장하여, 이를 입법화하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정부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생의 말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원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마저도 삶의 가치를 유용성과 생산성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경향에 물들어, ‘사람들 사이의 친교와 연대’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점점 희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한 권의 책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서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존엄한 죽음’의 의미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의사조력자살과 안락사를 ‘존엄사’라고 부르는 언론, 입법자, 정부 관계자가 있다면, 그 표현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분명하고도 정중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입법자들과 정책 담당자들은,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지지가 단순한 ‘찬성’의 표명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적 미비와 돌봄 체계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임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