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불의, 식별하는 눈

(가톨릭신문)

사순 5주간 월요일 미사 독서는 매우 길었다. 구약 예언서인 다니엘서 13장이었는데 200자 원고지 35장 분량이다. 예언자 다니엘이 억울한 누명을 쓴 수산나를 구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바빌론의 넓은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부유한 요아킴이 주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여인 수산나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무렵 어떤 두 원로가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줄곧 요아킴의 집에 머물며 소송 거리를 들고 찾아오는 이들을 만났다. 사람들이 없을 때 홀로 정원을 거니는 수산나를 눈여겨본 두 원로는 음욕을 품었고 하녀를 내보낸 뒤 혼자 목욕하던 수산나에게 달려가 겁박했다. 우리와 자지 않으면 젊은이와 간통했다고 증언하겠다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수산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달려왔고 재판이 열렸다. 백성의 원로이자 재판관인 두 사람의 일치된 말을 믿고 회중들은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다니엘이 나타나 온 백성에게 외쳤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도 않고 사실도 알아보지 않고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재판관인 이 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두 재판관을 분리한 뒤 한 사람씩 간통의 현장이 어디인지 물었는데 유향나무 아래와 떡갈나무 아래로 증언이 엇갈렸다. 거짓 증언이 들통난 것을 목격한 회중은 하느님께 희망을 가진 이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들고 일어나 거짓 증언을 했던 두 재판관을 사형에 처했다. 수산나의 무죄가 입증되자 온 가족이 수산나를 두고 하느님을 칭송하였고 다니엘은 백성 앞에서 큰 사람이 되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이주시켰을 때의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인데 매우 익숙하게 들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일어났던 일이어서 그럴 것이다. 정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판단해 상을 줄 사람에게 상을 주고 벌을 줄 사람에겐 벌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123일을 이어온 내란도 다르지 않다. 다행히 헌법재판관들이 다니엘처럼 올바른 판결을 내려 정의와 불의가 명명백백해졌다. 그런데 끝난 것 같은 내란이 여전히 진행형인 것 같아 걱정이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식별’의 눈이다. 죄 없는 수산나를 죄인으로 몰고 간 재판관도 나쁘지만, 재판관의 말만 믿고 식별하지 못한 채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한 회중들의 잘못도 크다. 재판관의 잘못된 판정을 깨닫도록 눈을 뜨게 해준 예언자 다니엘 덕분에 정의와 불의를 명백하게 식별한 회중들이 뒤늦게 죄인을 벌할 수 있었다.


억울한 모함에 굴복하지 않고 입을 열어 소리쳤던 수산나와, 눈앞에서 벌어진 불의에 방관하지 않고 개입해 진실을 밝힌 다니엘,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져 마침내 식별해 낸 회중까지 세 주체가 합심해야 정의로운 세상이 가능하다.


남의 것이 내 손에 있다면 그것은 불의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우하는 것은 정의다. 헌법을 지키는 것은 정의이고 헌법을 어기고 무시하는 것은 당연히 불의다. 자격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앉아 사욕을 채우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은 자도, 앉힌 사람들도 불의한 무리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정의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또한 정의다. 수산나를 살린 식별의 눈이야말로 올곧고 아름다운 정의다. 십자가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찬란한 부활로 이어진 것 또한 정의다.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우뚝 세우는 이 ‘식별의 눈’을 우리는 가졌는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