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빈 평화칼럼] “이제 종교가 보이네요”

(가톨릭평화신문)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탄핵 찬반 집회가 늘 화제였다. 무신론자인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이제야 종교가 보이네.” 그래서? “천주교 사제들은 어느 편인가? 탄핵 찬성인 것 같은데 왜 거리로 나서지 않는가?” “글쎄? 정치적 성향은 사제와 신자마다 다를 수 있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대체로 비슷한 것 같은데?.” 두루뭉술하게 답하자 또다시 되묻는다. “그럼 뭐가 옳은 건데?”

대통령이 파면된 탄핵 정국은 공동체 분열이란 큰 상처를 남겼다. 주된 가해자는 극우 정치화된 종교 집단이었다. 일부 개신교 목사는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종교를 이용했다. 탄핵 반대 집회 연단에 선 목사는 혐오와 증오의 얼굴을 하고 담기조차 힘든 욕설과 저주를 내뱉었다. 법치를 무시하고 국민 저항권을 외치며 폭력을 조장했다.

극우 목사가 이끄는 탄핵 반대 집회 현장엔 사랑과 평화·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없었다. 독재를 애국으로 가장한 태극기와 미국을 구원자로 위장한 성조기만 난무했다. 일부 정치인도 이들 극우 세력에 포위됐다. “하나님도 내 손에 죽을 수 있다”는 목사의 신성 모독 발언에 머리를 조아렸다. “공수처·선관위·헌법재판소를 때려 부숴야 한다”는 반민주·반공화적 발언에 “옳소! 맞소!”를 외쳤다.

탄핵 정국에서 한국 천주교회도 신앙생활과는 별개로 신자들의 견해가 극명하게 갈렸다. 본당 사목자들은 정치적 이념적 발언을 극도로 삼갔다. 전례와 성사 등 신앙에 집중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길 열심히 기도했다. 시국 미사와 대국민 담화에는 이념과 성향·주장에 따른 편가름을 멀리하고 정의와 양심·화해와 통합 그리고 상생을 담았다.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되어야 할 일은 빠르게 되도록 하는 일이 정의의 실현이며 양심의 회복이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의 메시지는 숨죽이며 눈치만 보고 일탈한 양심에 경종을 울렸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는 탄핵 너머 대선 정국에서 구원받은 양심과 정의가 해야 할 일을 제시했다. 책임과 도덕성을 갖추고 공동선을 실현할 지도자를 식별하자는 당부였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도 적개심과 증오를 버리고 사랑과 용서로 서로를 품는 절제와 인내의 미덕을 호소했다.

그리스도인(개신교)으로 평생을 살아온 김형석(105)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대통령 파면 전 가톨릭서울법조회 강연에서 “정의는 사랑으로 완성된다”며 “정의를 지키면서 그 위에 사랑을 둬야 좋은 사회가 된다”고 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정당화되는 정의와 평화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혼란의 시기에 천주교를 비롯한 정통 종교는 보편타당한 가치의 실현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데 선봉에 섰다. 타락한 극우 종교의 정치화가 낳은 비극이었다.

헌법이 규정한 종교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정교분리는 민주주의와 법치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 이를 부정하는 종교인은 종교인이 아니다. 종교가 지향하는 대화와 타협, 협력과 포용은 민주공화국이 작동하는 기본 요건과 맥을 같이한다.

혼란의 탄핵 정국을 거치며 종교를 멀리했던 젊은이들이 종교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다시 보고 있다. 어떤 종교가 흔들리는 자신의 가치관을 바로잡아 주고, 갈길 잃은 우리 사회를 돌볼 수 있을까? 정의롭고 공정하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오직 하나의 목소리로 대변해 줄 종교를 그들은 찾고 있다.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윤리적으로 타락한 종교 집단의 선전·선동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주권자인 국민만 바라보고 불면(不眠)의 일상을 숙면(熟眠)의 일상으로 바꿔줄 지도자는 과연 누구일까? 냉철하고 이성적인 관찰로 부활하신 예수님께 지혜를 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