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차림 두 여인과 백합… 침묵과 고요 동반한 기도의 순간

(가톨릭평화신문)
▲ 서세옥 화백이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한 ‘기구’는 순교자 김효임 골룸바와 김효주 아녜스를 주제로 그린 묵화다.

▲ 서세옥 작 ‘운월(暈月)의 장(章)’, 1954년.



과거에 있었던 일을 되뇌며 정리하는 일은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출품작가 23인이 지내온 삶과 예술 세계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감사하게도 글을 읽으신 분들이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시곤 해서 한 작품 한 작품 소개할 때마다 책임감이 더해짐을 느낀다.



생존 작가지만 작품 소재 밝혀지지 않아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 실물이 확인된 여섯 작품의 작가 가운데 생존한 작가로는 김병기 화백과 남용우 화백이 유일하다. 오늘 소개할 서세옥(徐世鈺, 1929~) 화백 역시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했던 생존 작가지만 그의 작품 소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흑백 사진 자료로만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작가의 병환으로 작품에 대한 증언을 직접 듣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서세옥 화백은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 한국화 ‘기구(祈求)’를 출품했다. 그의 작품 사진은 전시장을 찾은 노기남 주교의 모습이 담긴 사진 배경에 걸려 있어 출품작임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고 작품의 규모도 가늠할 수 있다. 사진상으로 보았을 때 왼쪽 끝에 걸린 남용우 화백의 ‘성모칠고’와 비슷한 크기로 보여 100호가량 되는 꽤 큰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짙은 색 액자에 끼워져 전시되었다.

구상적이지만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된 것 같은 느낌으로 그려진 두 여인과 백합꽃 가지들이 함께 표현된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서세옥 화백의 그림이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서 화백 특유의 추상적인 인간군상에 더 익숙해져 있어 그랬던 것 같다.

서세옥은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부 회화과에서 동양화를 연구하고 1950년 1회로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인 1949년 ‘꽃장수’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화단에 데뷔해 서정적인 추상계통의 동양화를 선보였다.

서 화백은 1960년 묵림회(墨林會)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현대화된 형식의 한국화를 추구했으며 동양수묵의 무채담묵, 여백 공간의 강점만을 살려 현대적이며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추구했다고 평가받는다.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출강하여 1995년까지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서세옥의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 ‘기구’는 작품 왼편에 서명이 남아 있어 출품연도와 작가 확인이 가능하고 다른 농담의 점묘로 표현된 배경에서 수묵채색화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품 왼편의 서명을 살펴보면 ‘1954년 중추절 밤에 徐世鈺(서세옥)이 그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몇 글자는 화면상으로 판독이 어렵다.



간결하면서도 상징성 강한 구상적 표현

이 작품은 서세옥이 같은 해인 1954년 완성한 작품으로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운월(暈月)의 장(章)’에서 보여준 인물 표현과 연관돼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화풍의 작품이다.

‘운월의 장’은 한국전쟁으로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이웃과 그 혈육의 참담한 처지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간결하고 압축적인 구성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같은 해에 제작된 ‘기구’에서도 이와 같은 간결하면서도 상징성이 강한 구상적 표현이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서 화백의 ‘기구’에는 한복 차림의 두 여인과 백합꽃이 나란히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두 여인 중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이는 비둘기를 품에 안고 있고 오른쪽에 옆모습으로 표현된 인물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다. 지그시 감은 눈과 굳게 다문 입술, 정지한 듯한 자세는 침묵과 고요를 동반한 기도의 순간을 느끼게 해준다.

작품 속 두 여인은 누구일까? 작가가 작품의 주제를 추상적으로 제시한 만큼 등장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주제를 고려했을 때 한국의 순교자 성녀 김효임 골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로 해석될 수 있겠다.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된 작품 중 김효임 골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를 주제로 한 작품은 김세중의 조각 작품이 유일하다. 서세옥의 ‘기구’는 비록 제목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과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와 함께 그려진 이 두 여인을 김골룸바ㆍ아녜스 자매로 해석하는 데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두 여인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는 원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작품 상단에 두 여인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는 원은 무엇일까? 두 자매의 후광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작품 왼편에 ‘1954년 중추절 밤에 그렸다’는 문구에 따라 보름달을 그려 넣은 것일까? 작가는 판에 박힌 후광 대신 달무리로 그 표현을 대신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후광에 두 인물을 배치한 것도 특이하지만, 이 작품이 출품되던 당시 김 골룸바ㆍ아녜스 자매는 성인이 아닌 복자였으므로 후광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해석들이 무색하게 작가는 그저 기도하는 밤에 마주한 달을 무심히 그린 것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서 화백의 ‘기구’는 화면에 담긴 여러 요소를 토대로 중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그리스도교적인 상징과 우리의 토속적인 정서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서세옥 화백의 ‘기구’를 가톨릭출판사에서 보았다는 분의 증언을 토대로 이 작품을 찾아보고 있다. 작품의 규모가 상당해서 쉽게 눈에 띌 수 있을 것 같은데, 작품 이미지가 알려졌으니 원작품을 찾았다는 소식을 곧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