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난 순교자] (2) 대흥봉수산순교성지

(가톨릭신문)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이 마을은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로 유명한 마을이다. 밤에 몰래 서로의 논에 볏단을 건네줬다는 우애 깊은 이성만·이순 형제의 이야기가 담긴 ‘의좋은형제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또 다른 의좋은 형제를 만날 수 있는 성지가 나온다. 바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나누던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베드로)과 복자 김광옥(안드레아) 형제를 현양하는 대전교구 대흥봉수산순교성지(전담 윤인규 신부,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다.


■ 순교자가 머물던 감옥

성지에 들어서니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이 인상적이다. 기와지붕에 나무와 흙벽으로 이뤄진 익숙한 건물이지만, 가까이 가면 일반적인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문마다 창호 없는 창이 뚫려있고, 지붕 바로 아래 달린 작은 창에는 창살이 쳐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건물의 독특한 형태가 이해가 간다. 나무로 된 창살에 자그마한 방, 바로 옥사(獄舍)였기 때문이다. 대흥 형옥원(刑獄圓)에 재현된 대흥관아의 옥사 모습이다.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는 옥, 고신(拷訊)과 형벌을 가하는 환토(?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대흥관아의 옥은 상중리 296번지 일원 옥담거리에 있었다. 또 사형을 집행하던 처형장은 예당호 내천변에 있었고, 조리돌림 등의 고신이 행해지던 저잣거리는 동서리 173번지 인근에 있었다. 김정신(스테파노·단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형옥원은 이들을 재현·기념하는 공간이다.

십자형태의 거리의 모습으로 조성된 형옥원의 마당에는 조리돌림, 팔주리 등의 고신과 주리틀기와 큰칼 등의 형구, 그리고 사형에 이르는 과정들이 묘사된 그림과 설명문들이 있었다. 형벌을 집행하던 의자와 곤장대도 놓여 있었다. 바로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초들이다.

옥사에 들어가니 3개의 방이 있었다. 사각형의 방에는 죄인들이 목에 차는 칼과 곤장을 칠 때 사용했을 형구들이 놓여있었다. 순교자들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수개월동안 모진 형벌과 고통을 참아내던 공간이 이런 작은 공간이었다.

이 대흥관아의 옥사 대흥옥(大興獄)을 재현한 건물에 김정득 복자의 성화가 걸려있었다. 대흥옥은 순교자들이 갇힌 수많은 감옥 중에서도 복자 김정득이 처형을 기다리던 곳이다.


■ 우애 좋은 형제 순교자

대흥옥에는 김정득과 함께 그 사촌형제인 복자 김광옥의 성화도 함께 걸려있었다. 사실 김광옥은 이 지역과는 크게 연고가 없는 순교자다. 인근 고을인 예산에서 면장을 맡던 김광옥은 예산과 청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달하고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예산의 처형장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김정득의 순교를 기리는 이곳에서 김광옥을 함께 현양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은 복자 김광옥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두 형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갔다. 두 형제가 피신하면서 가져간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교회 서적과 성물이었다. 두 형제는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숨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피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더 빨리 발각됐던 것이다. 김정득은 홍주로, 김광옥은 예산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고, 이후 함께 청주에 수감돼 형벌을 받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김정득이 어떤 신앙생활을 이어왔는지는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8월 21일 한양에서 내려진 김정득의 사형선고는 김정득의 삶과 신앙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선고문을 보면 김정득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신앙을 증언했을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어떤 형벌과 문초에도 신앙을 반대하는 말이나 다른 신자들의 거처를 밝히는 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지에 조성된 형옥원의 중앙에 성모상이 세워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성모상을 받치고 있는 돌 앞에 참수대(斬首臺)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참수대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순교자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전구해준 순교의 동반자였다. 김광옥은 들것에 실려 형장에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처형장에 이르러서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무릎을 꿇은 채 큰 소리로 끝까지 기도를 바친 후에야 참수대에 스스로 머리를 뉘었다고 한다.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오던 길, 각자의 처형지인 대흥과 예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두 형제는 손을 맞잡고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였지만, 두 형제의 얼굴은 더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의좋은 순교자, 김정득과 김광옥 형제는 1801년 8월 25일 각각 대흥과 예산의 처형지에서 한 날 한 시에 참수로 순교했다.

■ 대흥봉수산성지

대흥면에서도 봉수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대흥봉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성지는 두 형제뿐 아니라 대흥고을 출신의 여러 순교자들도 현양하고 있다. 뮈텔 주교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작성한 「치명일기」에는 황 베드로, 백청여, 원지우 안드레아, 이 루도비코, 이 아우구스티노, 원 요셉 등 대흥고을 출신 순교자 7위가 기록돼있기도 하다.

아울러 성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되새기고 전해나갈 계획이다. 봉수산과 예당저수지와 조화를 이루는 자연환경 속에서 순교영성과 창조질서보전을 함께 전파해나갈 예정이다. 성지에서는 매주 월요일은 오전 7시에, 화~주일은 오전 11시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성지 전담 윤인규 신부는 “성지는 이 시대에 김정득·김광옥 복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의를 나누는 영성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며 “또한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다”고 소개했다.

※문의 041-333-0202 대흥봉수산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