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사이로 순례지 찾아 44㎞ 걷다 보면 순교 신심 새록새록

(가톨릭평화신문)
 
▲ 서울 순례길을 따라 성곽길을 걷는 사제와 신자들.

 

 

 

 


우뚝 솟은 빌딩들과 무수히 많은 상점…. 얼키설키 엮인 도로 위로 현대인의 바쁜 일상이 움직이는 도심 곳곳에서 여전히 고요한 믿음의 숨결을 내뿜고 있는 신앙 선조를 만나는 길. 바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지닌 특별한 매력이다.

‘천주교 서울 순례길’은 한국 교회 첫 신앙 공동체와 사목지, 순교지, 순교자 묘소와 사제 양성 못자리인 신학교 등 순례지 24개를 세 코스로 나눈 44.1㎞ 길이의 도보 순례길이다. △‘말씀의 길’(명동대성당~가회동성당 9개소, 8.7㎞) △‘생명의 길’(가회동성당~중림동약현성당 9개소, 5.9㎞) △‘일치의 길’(중림동약현성당~삼성산성지 8개소, 29.5㎞)로 조성된 순례길은 우리 역사와 더불어 박해의 아픔과 선조들의 굳은 믿음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여정이다. 순례길 코스별 특징을 알아본다.



말씀의 길

 

 

 

 

 

 

 
 


신앙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공동체를 형성한 장소를 순례하고 싶다면 ‘말씀의 길’을 추천한다. 1784년 신자들이 처음 모임을 시작한 ‘김범우의 집터’를 비롯해 이 땅에서 첫 세례성사가 거행된 ‘이벽의 집터’에서는 평신도들에 의해 형성된 초창기 믿음을 느낄 수 있다. 빌딩 사이 기념 표석 앞에서 묵상에 젖어들다 보면 ‘이곳이 믿음의 장소였구나’ 하는 새 느낌을 얻게 된다.

한국 교회 1번지 주교좌 명동대성당 순례 때 꼭 들러야 할 곳은 ‘서울대교구 역사관’이다. 1890년 건축돼 주교관으로도 쓰였던 이 건물은 2018년 역사관으로 거듭났으며, 연중 전시를 하는 곳이다.

조선 관아로 끌려온 순교자들의 행적을 알고 싶다면? 서울 종로 좌ㆍ우포도청 터를 관할하는 ‘포도청 순례지 성당’인 종로성당으로 향해보자. 성당 내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은 관아에 끌려와 신앙을 증거하다 형장의 이슬이 된 순교자들의 기록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놨다.

고문 끝에 순교한 이들은 광희문 밖으로 내버려졌다. 광희문 앞 ‘광희문 천주교 순교자 현양관’은 794위 순교자를 기리는 공간. 주말 오후 3시에 방문하면 미사로 순교자를 더욱 현양할 수 있다.



생명의 길

 

 

 

 

 

 

 

 

 
 



죽음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 ‘생명의 길’은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선조들을 현양하는 여정이다. 순례길의 시작지인 가회동성당은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1795년 처음 미사를 봉헌한 곳이다. 조선 당국이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박해를 본격 시작한 지역이기도 하다. 북촌 한옥마을의 전통 느낌을 살려 건축된 가회동성당 마당에 조성된 한옥 대청마루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수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오가는 광화문광장은 거룩한 장소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느님의 종 124위를 시복한 곳으로, 광화문 정면 북측 광장엔 ‘124 시복 터’ 표석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주님을 섬겼던 이들이 끌려다닌 무시무시한 죽음의 장소였던 도심 한복판은 이제 선조들을 복된 자로 찬양하고 기억하는 생명의 장소로 거듭났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순교지 중 가장 많은 44위의 성인과 27위 복자를 배출한 곳. 5월 새 단장을 마치고 봉헌된 이곳은 더는 죽음의 형장이 아닌,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위로받는 장소가 됐다. 지하 공간에 넓게 조성된 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상설 전시와 연극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순교자 영성을 접할 수 있다.



일치의 길

 

 

 

 

 

 

 

 
 



서울 대표 성지들을 순례하려면 ‘일치의 길’을 택하자. 성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와 평신도가 순교한 새남터 순교성지에선 순교자 유해도 뵙고, 성지 입구에 설치된 대형 순교자 유리화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순교자 기념관에선 박해 때 쓰인 형구 틀 체험도 해볼 수 있다. 매년 9월 한 달간 순교자현양대회를 열어 미사와 강의로 순교 신심을 드높이고 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 성인을 배출한 당고개 순교성지는 복녀 이성례 마리아 영성에서 영감을 얻어 조성된 ‘어머니의 성지’같은 장소다. 박해의 고통을 찔레꽃 가시로, 하느님 은총을 매화꽃 향기로 표현한 성지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된 넓은 마당과 한옥, 성당 등 당고개성지만의 고즈넉한 영성을 전하고 있다.

수많은 천주교인의 목이 잘린 절두산 순교성지에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순교자 박물관이 있다. 현재 기해박해 180주년 기념 상설 전시가 한창이며, 성지 곳곳에 설치된 작품들을 통해서도 목숨을 주저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박해사를 기억할 수 있다. 27위 성인과 무명 순교자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은 조용한 기도로 선조들을 현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