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순교자들 발자취를 찾다] (3) 원주교구 성내동성당

(가톨릭신문)

강원도 삼척시 성당길 34-84, 언덕으로 오르는 작은 길에 들어서니 ‘성내동성당’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보인다. 영동남부지방 복음전파 근거지이자 1950년대 후반 지방건축기술을 알 수 있는 건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된 곳이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 이 성당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삼척에 복음이 뿌리내리고 널리 퍼지기까지 목숨을 바쳐 선교한 하느님의 종 제임스 매긴(진 야고보) 신부를 기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 삼척을 바라보는 성당

일반적으로 성당 부지에 들어서면 성당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원주교구 성내동성당을 처음 방문하면서 그런 기대를 지니고 있다면 조금 당황할 수도 있다. 성당으로 향하는 길에서 보는 성당 모습이 성당 중앙 입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 왼쪽 뒤이기 때문이다. 고딕 성당이라는 건축양식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어디로 가야 성당 입구인가 하는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바로 성당 전경은 볼 수 없었지만, 성당이 이어오고 있는 정신만큼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성당에 들어서는 그곳에 ‘진 야고보 신부 순교 기념비’ 바로 하느님의 종 제임스 매긴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성당 중앙 입구 쪽으로 이동하니 성당이 왜 뒷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언덕 위에 자리한 성당에서는 삼척시내가 한 눈에 보였다. 달리 말하면 성당은 늘 삼척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삼척 사람들을 늘 사랑으로 대했던 매긴 신부를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








■ 푸른 눈의 자상한 아버지(神父)

매긴 신부가 이곳 삼척에 온 것은 1949년 10월. 삼척본당(현 성내동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다. 당시 삼척 사람들은 ‘천주교’가 무엇인지, ‘신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직 성당 건물도 없었고, 매긴 신부가 일반 가정집에 살고 있어 그저 외국인이 공기 좋고 풍경 좋은 곳에서 살려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생전 처음 외국인을 보다 보니 온 주민들의 관심이 매긴 신부에게 쏠렸다.

혈혈단신. 당시 매긴 신부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한국어도 한국 풍습도 낯선 상황이었고, 가족도 친구도 동료 선교사도 없었다. 그런 매긴 신부가 삼척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한 방식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매긴 신부는 삼척 사람들을 늘 신뢰하는 자세로 친절하게 대했다. 주변 굶주린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줬고, 누더기를 입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신의 옷을 내어주기도 했다. 그런 매긴 신부의 사랑에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다고 한다. 사랑으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된 매긴 신부는 그야말로 영적인 아버지, 신부(神父) 그 자체였다.

매긴 신부는 특히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컸다. 보살핌을 받지 못해 지저분한 아이들이 있으면 따듯하게 물을 데워 손이며 발이며 직접 씻겨주기도 하고, 매긴 신부의 물건을 훔쳐가는 아이들에게조차도 자상하게 타이르곤 했다. 하루는 어떤 아이들이 매긴 신부의 집에서 사과를 훔치자 매긴 신부가 아이들을 불러 훔친 사과를 돌려받으며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 가르친 일이 있었다. 아이들을 타이른 매긴 신부는 사과나무에서 아이들이 훔친 것보다 더 좋은 사과를 한 아름 따서 아이들에게 줘 돌려보냈다고 한다.


■ “우리 천국에서 만납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신자들은 매긴 신부에게 피신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매긴 신부는 “가톨릭 신앙으로 무신론자와 맞서야 한다”며 “공산주의자들에게 하느님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성당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매긴 신부에게 피난을 호소했지만, 매긴 신부는 오히려 피난을 가는 이들에게 자신의 금고에 둔 돈을 모두 나눠주기까지 했다.

1950년 7월 1일 공산군이 삼척 지역을 점령하자 매긴 신부는 즉시 공산군에게 체포됐다. 공산군이 체포하러 올 것을 기다리고 있던 매긴 신부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잡으러 온 공산군에게 성당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는 매긴 신부를 발로 차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며 성당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매긴 신부는 공산군들에게 미소를 짓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는 도망갈 사람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라”며 공산군의 총구 앞에서도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공산군은 매긴 신부를 고문했고, 존재하지도 않는 신 때문에 어리석게 목숨을 포기하지 말고 공산주의를 따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매긴 신부는 심한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성내동성당에는 매긴 신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띠고 있는 매긴 신부의 얼굴이 마치 성당을 찾는 모든 이를 축복하는 듯했다. 실제로도 매긴 신부는 자신의 죽음을 앞둔 그 순간까지도 신자들을 위한 축복을 잊지 않았다.

1950년 7월 4일. 공산군은 한밤 중에 매긴 신부에게 총구를 겨누고 감옥에서 끌어냈다. 죽음의 순간이 왔음을 안 매긴 신부는 옆방에 감금돼 있던 신자 김수성(요한)씨에게 축복을 하고 떠나 공산군의 총에 순교했다.

잠시 성당에서 매긴 신부의 삶을 묵상했다. 묵상하는 중 매긴 신부가 김씨를 축복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꼭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우리 천국에서 만납시다. 절대로 신심을 잊지 마시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