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꽃’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영성과 숨결이 깃든 리지외

(가톨릭평화신문)
리지외의 성 데레사 기념성당과 종탑. 비오 11세 교황의 전폭적 지원과 전 세계 신자들의 후원으로 1929년 착공해 1954년 완공한 네오비잔틴 양식의 준대성전이다. 파리 몽마르트르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모델로 했다. 20세기 가장 큰 성당 중 하나로 높이 95m·길이 105m·너비 45m, 최대 4000명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1975년 완공된 종탑은 각 나라에서 기증한 51개 카리용 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두어 시간 달리면 창밖으로 노르망디의 푸른 들판이 펼쳐집니다. 이 지역은 프랑스 사과 브랜디인 ‘칼바도스’와 카망베르 치즈의 본고장으로 유명한 관광지입니다만, 사실 프랑스에서 루르드 다음으로 큰 순례지가 있는 곳이지요. 곧 나지막한 구릉들 사이로 작은 도시 리지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리지외는 ‘작은 꽃’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삶과 영성이 숨 쉬는 곳입니다. 도시 곳곳에 장미꽃을 안은 데레사 수녀 성상이 눈에 띄고, 성 데레사란 이름이 보입니다. 일상 풍경에서 성인의 삶이 녹아들어 마치 성인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듯합니다.
 
성 데레사 성당 주제대와 본랑. 성당 내부는 대부분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후진 천장에는 착한 목자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성 데레사가 그려져 있다. 남쪽 익랑 시보리움에 성 데레사의 성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본랑을 둘러싸고 18개국이 봉헌한 보조제단이 있다.

작은 꽃이 피어난 도시 리지외

리지외역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르멜회 수도원이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1888년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기도하고 생활했던 곳입니다. 수도원 성당은 성인의 삶처럼 간결하고 단아합니다.

성녀 데레사의 삶은 어떤 극적인 기적이나 뛰어난 업적과는 거리가 멉니다. 데레사는 1873년 프랑스 알랑송의 마르탱 가문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인 루이 마르탱과 젤리 마르탱은 둘 다 신앙이 깊은 신자였고, 하느님 사랑을 중시하며 자녀들을 키웠죠. 어린 데레사는 밝고 감수성 예민한 아이였으나, 네 살 때인 1877년 어머니를 여의면서 큰 아픔을 겪습니다. 그 후 가족은 외삼촌이 사는 리지외로 이사했고, 데레사는 언니들의 보살핌 속에 성장합니다.

19세기 후반 데레사 성녀의 가족이 이주한 당시 리지외는 인구 1만 5000명 남짓의 평화로운 도시였습니다. 파리-셰르부르 철도가 개통되며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차분한 분위기 속에 가톨릭 신앙과 시민 생활이 조화를 이루는 안정된 도시였지요. 데레사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수도자로서 소명을 느낍니다. 특히 언니 셋이 가르멜회 수도자가 되면서 데레사도 열정이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당시 교회법상 16세부터 수도원에 입회할 수 있었습니다. 데레사는 아버지와 로마 순례 중 레오 13세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입회를 허락해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15세에 예외적으로 교구장의 입회를 허가받아 1888년 부활 팔일 축제 마지막 날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합니다.

그녀의 수도 생활은 단조롭고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외부 세계와 거의 단절된 수녀원 안에서의 일상은 기도·청소·독서·묵상·공동체 생활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됐지요. 1897년 9월 30일 데레사는 겨우 24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뜹니다. 너무도 짧은 생애였지만, 그녀의 존재는 죽음 이후 더욱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르멜 수도회 수도원과 수도원 소성당의 성 데레사 성해. 1838년 피에르 소바주 신부가 설립한 가르멜회 수도원으로 데레사 성녀가 1888년부터 1897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언니들인 마리 루이즈·폴린·셀린과 함께 수도 생활을 한 곳이다.

거룩함으로 가는 작은 길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수녀’가 어떻게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성인이 되었을까? 데레사 수녀는 수도원에서 특별한 소임이나 큰 직책을 맡았던 것도 아니었고,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글을 남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일상에서 작은 희생·친절·인내를 실천하면서 살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작고 보잘것없음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오히려 하느님 사랑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삶을 살았지요.

데레사 수녀는 이런 삶을 크나큰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동료 중 자기를 오해한 이들도 있었지만, 불평 없이 모든 사람을 예수님 보듯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꽃”이라는 고백처럼 평범한 순간 속에 작은 사랑을 담아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데레사 수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죽어서도 세상에 장미 꽃비를 뿌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전 세계 신자들의 체험 속에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위로와 치유를 경험했으며, 그녀의 기도는 전장에 나간 군인들의 주머니 안에도, 병상에 누운 환자들의 손끝에도, 삶의 무게에 지친 이들의 마음에도 스며들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수녀가 그렇게 하늘에서 온 세상에 장미꽃을 뿌린 것이지요.
 
기념성당 지하 소성당과 성 마르틴 부부의 성해함. 1925년 아르데코 박람회의 스타일을 본떠 1932년 완공했다. 성 데레사의 삶을 묘사한 모자이크를 볼 수 있으며, 2008년부터 제대에 성인의 부모인 성 루이 마르탱과 성 젤리 마르탱의 성해함이 모셔져 있다.


작은 수녀’가 남긴 커다란 사랑의 흔적

리지외의 언덕에는 성 데레사 기념성당이 있습니다. 파리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에서 영감을 받은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하얀 외관은 깔끔하면서도 둥근 돔과 아치형 창문들이 어우러져 우아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돔 위의 커다란 십자가는 어디에서나 보일 정도로 높이 솟아있어, 마치 이 도시를 수호하는 등대처럼 느껴집니다.

성당의 황금빛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면서 성녀의 삶과 가르침을 배웁니다. 특히 돔 천장에 그려진 예수 성심과 성인의 좌우명은 순례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지요. 각국이 봉헌한 보조제단에서 하느님 아래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하 소성당은 가족 성화의 장소입니다. 성인의 부모인 성 루이 마르탱과 성녀 젤리 마르탱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가톨릭 역사상 부부가 함께 시성된 첫 사례이지요. 가족 7명 중 5명이 수도자, 3명이 성인인 이 가정의 가훈은 “하느님을 우선시하고 사랑과 믿음, 정의와 자선”이었습니다.

성당을 나오면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이곳을 벗어난 적 없는 리지외의 데레사를 전 세계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선교를 위해 봉헌한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 사랑하며 자신을 낮춘 단순하고 겸손하게 산 삶,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그 ‘작은 길’이 기적을 보고도 꿈쩍 않는 얼어붙은 우리 세대에 더욱 강한 울림을 주는 듯합니다.

 

<순례 팁>

※ 리지외행 열차는 파리 생라자르역에서 출발.(2시간 소요) 기차역·가르멜회 수도원·생피에르 대성당·성인의 생가·바실리카 사이 거리는 1㎞ 안팎.

※ 수도원 소성당 옆에 성 데레사 기념관.(10:00~11:30, 14:00~16:30, 37 Rue du Carmel) 한국어 팸플릿도 있다.

※ 기념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 9:00·11:00·18:00(11.1~4.1)/18:30, 평일 11:45(지하 소성당)·18:15, 가르멜회 수도원 소성당 미사 : 주일 10:00, 평일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