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신호등이 너무 밝아요

(가톨릭신문)

신호등은 어느 때에도 잘 보여야 합니다. 눈비가 올 때나, 날이 흐릴 때나, 햇빛이 쨍쨍한 낮에도 잘 보여야 하는 게 신호등입니다. 유난히 밝은 신호등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초록불에는 지체해서는 안 된다!’ ‘빨간불에는 어떻게든 멈춰야 한다!’ ‘노랑불에는 길게 고민해서는 안 된다!’

 

조금 빨리 출발하지 못해서, 조금 부주의해서, 너무 망설였다는 이유로 도로에는 경적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울릴 때가 있습니다. 조금 빨리 출발하지 못해도, 조금 부주의해도, 평소보다 망설이더라도 그럴 수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지만 도로에서는 심판의 잣대가 유독 날카로운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밤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떠오른 달을 보았습니다. 은은한 달빛이 신호등의 노란빛과 대조되며 참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신호등의 노란불은 길게 고민하지 말 것을 재촉하지만, 은은한 달빛은 고민이 필요하다면 충분히 시간을 가져도 된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판단하고 서로 선을 긋고 밀어내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기다려 주시고 품어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엄격하고 무서운 높은 차원의 존재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성경을 천천히 읽고 묵상하면 그분께서 얼마나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시는지 매번 새롭게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걱정으로 채워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빨리 가지 못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실수로, 망설임이 길어져서 내 삶을 부정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도로 위의 경적을 울리듯 나에게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잠깐의 시간일 뿐입니다.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자연의 초록색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주 조금씩 올라오는 봄날의 새순들은 우리의 성급함을 달래주기도 합니다. 깊어지는 밤중에 보이는 노란 달빛은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은은히 빛나는 달빛은 그분께서 우리와 지금 함께 고민하며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빨갛게 물든 열매들은 얼마나 달콤합니까? 멈춰야만 수확할 수 있는 그 순간은 우리에게 멈춤이 나쁜 것만은 아님을 알려 줍니다.

 

 

인간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지치고 불안한 마음으로 나의 하루를 힘겹게 견뎌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평화롭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하루를 충만히 채워갑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관념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가 행복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주님의 그 마음 잊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한 하느님과의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