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현재 볼리비아 산타크루즈대교구에서 선교 사목 중인 김현준 베네딕토 신부입니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 인사드릴 수 있어 참 기쁘고 뜻깊게 생각합니다. 처음 이 연재를 제안받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혹시 제 글이 볼리비아에 대해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 짧은 지면 속에 제 삶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곳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며 제가 보고 느끼고 감사했던 작은 순간들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연재는 ‘선교 보고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일기장이자 성장기가 될 것 같습니다.
2021년 2월 3일 수요일, 저는 한국을 떠나 남미 볼리비아 산타크루즈에 도착했습니다. 비행 시간만도 23시간이 걸렸지만, 이상하게도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멀리 떠나는 것, 낯선 언어와 문화를 넘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라 생각했고, 그 모든 ‘특별한 것들’을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이라 여겼지요.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선교는 특별함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삶 속에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선교라고 하면, 낙후된 환경과 힘든 사목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살아보면, 그런 ‘특별한 풍경’보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이웃과 인사하고, 함께 웃고 기도하는 일상적인 순간들이 더 많습니다. 그 소박하고 평범한 시간이 이제 제게는 가장 깊고 진실한 복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 평범한 순간들 가운데 지금도 유난히 마음에 남아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일’에 관한 기억입니다. 어느 날 밤, 문 밖에서 팡파르와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악단이 앞집 생일 축하를 위해 자정에 맞춰 찾아온 것이었지요. 생일파티는 아침까지 이어졌고, 큰 노랫소리에 저는 그날 거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청년들과 함께 생일파티하는 모습. 김현준 신부 제공
청년들이 준비한 케이크를 보고 감동받은 김 신부.
“생일날 수녀님들이 미역국 대신 끓여준 다시마국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됐습니다.” 축일을 맞은 수녀님들과 함께. 김현준 신부 제공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생일이 다가오면 은근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처음 맞이한 생일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첫해 저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본당 수녀원 안에서 지내며 언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출신 수녀님들은 외국 땅에서 지내는 제가 안쓰러우셨는지 생활의 모든 면을 아주 세심히 챙겨주셨습니다. 잠자리는 편한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생활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는지 등 말입니다. 특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봐 늘 걱정이셨지요.
그리고 제 생일이 되자, 수녀님들께서는 아주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바로 한국의 전통 생일 음식인 미역국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다 한국인은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미역국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질렀고, 그렇게 한 숟갈을 뜨게 되었는데, 맙소사! 국물은 너무 짜고 미역은 너무나 딱딱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미역이 아닌 다시마였습니다. 해맑게 웃고 계시는 수녀님들을 보면서 생전 처음 대하는 신개념 미역국(?)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마국을 깔끔하게 비워냈지요. 지금은 수녀님들도 미역과 다시마를 구분하게 되어 미안해하시지만, 그 마음과 정성이 참으로 고맙고 또 벅찹니다.
신자 분들도 매년 제 생일에 정성 가득한 선물들을 준비해주십니다. 작은 편지, 과자 한 봉지, 직접 만든 수공예품들까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운 한편, 저는 스스로 묻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을 받고 있는데, 과연 이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물론 아직도 저는 신자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다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받는 데 익숙해져 감사함을 잊은 사제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나누는 사제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동행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나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선물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사제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그 해처럼 느껴집니다. 아직 말을 잘 못하고 모르는 것도 많고 부족함은 여전하지만, 저는 오늘, 그리고 내일도 최선을 다해 이 사람들과 같은 길을 동행하고 싶습니다.
특별함을 기대하며 떠났던 저는 이제 평범함 속에서 진짜 복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곳에서 제가 받은 가장 큰 선물임을 오늘도 다시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