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골. 밤이면 아름다운 은하수가 펼쳐지던 교우촌이 있었다. 지금의 경기도 안성 미리내성지 자리에 모여 살던 신앙 선조들은 호롱불을 밝히고 별빛과 달빛이 비치는 시냇가 곁에서 기도했다. 호롱불 불빛과 자연의 빛이 어우러진 풍경은 신앙의 빛을 상징하듯 아름다웠다. 선조들이 떠난 자리에는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들이 호롱불 아래 드렸던 간절한 기도는 오늘날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기도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신앙이 만나는 곳, 미리내성지(전담 김진우 베드로 신부)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을 찾았다.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기도하는 성지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1846년 9월 16일, 형장 앞에 선 김대건 신부는 두려움 없이 이렇게 고백하며 순교했다. 당시 국사범으로 처형된 이들은 사흘 뒤 가족이나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시신은 땅에 묻힌 채 파수의 감시 속에 지켜졌다.
이 소식을 들은 미리내의 17살 청년 이민식(빈첸시오)은 유해를 모시기로 결심하고 새남터로 달려갔다. 그는 파수의 눈을 피해 시신을 몰래 수습해 인근에 임시로 매장한 뒤, 40일 후 다시 시신을 모시고 미리내로 향했다. 해가 진 뒤에만 길을 옮긴 여정은 꼬박 일주일이 걸렸고, 마침내 교우촌에 도착해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신자들은 하느님 곁으로 간 사제를 위해 무덤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로부터 55년 뒤인 1901년 5월 20일,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명으로 무덤이 발굴됐다. 이후 성인의 유해는 성지에 자리한 세 곳의 성당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 그리고 성 요셉 성당 제대 아래에 모셔졌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 앞마당에는 김 신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179년 전 교우촌 신자들이 무덤 앞에서 올렸던 간절한 기도는, 오늘날 성지를 찾는 신자들의 기도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성인을 기억하는 성당, 신자들 발걸음 멈추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성지를 둘러싼 산록의 푸르름은 여전히 교우촌 시절 청명한 분위기를 전한다. 십자가조차 드러내지 못했던 옛 교우촌 신자들을 위로하듯, 성지 입구에서 보이는 첨탑 위 빛나는 십자가가 이곳이 하느님 백성의 자리임을 알려준다.
십자가를 향해 오르는 길 끝에 웅장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산 중턱에 세워진 이 성당은 아랫지붕이 윗지붕을 받치는 독특한 구조로, 마치 커다란 제대를 형상화한 듯 입체감을 자랑한다. 외부의 장엄한 기운은 성당 내부로 이어지며, 고딕양식의 높은 천장과 제대 뒤에 펼쳐진 장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신자들의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한다.
제대 아래 모셔진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앞에서 기도를 봉헌한 뒤 제대 뒤를 올려다 보면, 5개의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속 김대건 신부와 103위 성인들의 모습이 찬연히 빛난다. 외부의 빛을 듬뿍 받아 가장 밝게 보이도록 설계된 중앙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여섯 명의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 성모 마리아와 성령이 그려져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며 김대건 신부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103위 성인들과 함께 드린 미사는 신자들의 마음을 더욱 깊은 신심으로 채운다. 성전 밖으로 나오면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을 혹은 묵주기도의 길을 기도하며 걷다 보면 순례자들은 성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과 묘소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