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오십시오!(묵시 14,6-13)

(가톨릭신문)

요한 묵시록 14장 6절부터 세 천사가 연달아 나타나면서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는 ‘영원한 복음’에 관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심판, 바빌론의 파멸, 그리고 하느님의 진노를 담고 있다. 이상하다. 복음이란 게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을 말할 터인데, 심판이니 진노니 하는 말마디들과 함께 이루어진 복음에 대한 서사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교부들, 예컨대 오리게네스는 ‘영원한 복음’을 두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페타우의 빅토리누스는 말라키의 예언(말라 3,5 참조)을 토대로 엘리야의 재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 영원한 복음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고심해야 한다.


마지막 시간, 영원한 복음을 듣는 이는 ‘모두’다. 복음을 듣는 데 예외로 분류된 사람은 없다. 묵시문학에서 습관적으로 ‘모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네 범주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모든 민족, 종족, 언어권, 그리고 백성. 그 모든 이에게 첫 번째 천사는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초대한다. 경외는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갖추어야 할 자세다.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마지막 시대에 갖추어야 할 자세는 경외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경외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묵시 4,9.11; 5,12; 19,7 참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경외는 회개와 성찰로 요한 묵시록은 설명한다.(묵시 11,13; 16,9 참조) 경외의 이유와 목적은, 그러므로 하느님이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데 있다.


심판이라는 개념 역시 경외의 이해와 맞닿아 있다. 심판은 잘잘못을 가려 이른바 상선벌악의 프로세스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요한 묵시록에서 심판은 이미 끝났고, 그 자리에 구원이 뚜렷하게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미 11장 18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민족들이 분개하였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진노가 닥쳤습니다. 이제 죽은 이들이 심판받을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이에게 상을 주시고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시키실 때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때를 맞닥뜨린 이들을 향해 요한 묵시록 14장 7절은 이렇게 호소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샘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 어떤 상황이든, 심판의 때는 경배의 때이다. 요한 묵시록은 이미 완성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 구원을 굳건히 누리고 지켜야 하는 당위를 심판이라는 말마디로 환기시키고 있다. 요한 묵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그렇고, 14장의 십사만 사천이 그렇고, 구원은 한번 얻어 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구원을 증언할 이들 안에 구체화 되는 것이다. 심판의 때는 구원의 때를 알리는 또 다른 호소다.



8절은 두 번째 천사의 선포를 들려준다. 심판의 끝은 ‘바빌론’을 향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바빌론’은 존재하지 않은 과거의 제국이었으나 ‘로마’를 빗대어 가리키는 은유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1베드 5,13; 2바룩 11,1 이하; 시빌 5,143 참조) 바빌론은 사라졌으나 로마는 바빌론의 위협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바빌론은 ‘난잡한 불륜의 술’을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했다. 하느님을 적대시하고 그분의 뜻에 반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전형적 문장이다.(나훔 3,4; 이사 1,21; 23,15 이하 참조) 하느님의 뜻에 반한다는 건, 단순히 성적 일탈이나 윤리적 해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불륜의 술은 일종의 우상숭배를 가리킨다.(예레 51,7 참조) 로마는 위대했고 화려했으며, 그로 인해 매력적인 추앙의 대상이었다. 우상숭배는 쉽게 식별되는 어긋난 것들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원의가 투사되는 ‘좋은 것들’ 안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법이다.


9절에 세 번째 천사가 나타나 또 다른 술을 언급하는데, 이번에는 하느님의 진노의 술잔이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형이다.(이사 51,17; 예레 25,15; 시편 75,9 이하 참조)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은 요한 묵시록 13장에 서술된 두 짐승을 떠올리는 표현들로 서술된다. 짐승의 표, 짐승의 상을 향한 경배, 그리고 그 짐승들을 따르고 추앙하는 이들이 요한 묵시록 13장에 이미 등장했었다.


신상생활은 예수님 따르는 것


세상 권력과 명예 탐하지 않고


주님에 대한 갈망과 열정으로 현실 논리 내려놓고 비우는 일


진노의 잔에는 다른 어떤 것도 섞이지 않는다.(당시 술을 마시기 위해 향신료 등을 섞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하느님의 진노는 확실하고 순수해서 우상숭배 하는 이들에겐 결정적이고 불가역적이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징벌을 가리키는 불과 유황이라는 말마디까지 곁들여져 하느님의 진노의 확실성을 배가한다.(창세 19,24; 신명 29,22 이하; 루카 17,29 참조)


그럼에도 우리의 희망은 ‘성도’들에게 있다. 성도들은 ‘인내’를 요구받는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바빌론, 짐승으로 대변되는 현실의 논리에 비껴가지 않는다. 현실 논리 안에서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일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묵시 1,9; 13,10 참조)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지 현실의 화려함과 부유함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어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에 휘청이지 않는다. 


요컨대 신앙은 주님 안에 죽는 일이다.(13절) 주님 안에 죽는 일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나, 그 죽음은 좌절이나 실패, 불행이나 슬픔이 아니라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을 만나고픈 그 열정 하나로 현실의 논리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비워내는 나 자신의 해방이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14장 8절에서 두 번째 천사가 외치는 그 선포는 나의, 우리의 결심이자 신앙의 목표가 된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오늘의 바빌론은 여전히 힘이 있으며, 내일의 바빌론으로 또다시 이어질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우리 신앙인은 주님 하나로 오늘을, 내일을 살아가기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에 수많은 바빌론은 무너진 채로 의미가 없으리라. 우리는 그저 이렇게만 말하면 되리라.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17)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