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이는 큰 신비입니다”(에페 5,32)

(가톨릭신문)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사도 바오로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유비로 선포하면서 ‘큰 신비’라 했다. 큰 신비에 함축된 여러 의미를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1~2장 참조)에 대한 재조명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갈라 4,4 참조) 숨겨 두신 혼인의 계획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서 완성돼야 할 ‘한 몸’의 신비다. 혼인의 내적 의미인 이 세 가지가 혼인이 가야 할 길이고, 진리이며, 역동하는 생명, 곧 사랑의 길이다.


먼저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과 가장 오래된 혼인과의 관계다. 사도 바오로는 단순히 외적인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둘의 관계를 유비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그들의 혼인을 재조명하라는 이유는 부부가 나누는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성을 갖기 때문이다. 공적으로 동의하고 맺은 혼인의 계약은 존중과 신의 그리고 사랑의 충실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변화 성숙의 여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고통, 슬픔과 즐거움의 일들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는 길이고, 이 참여를 통해 혼인의 성사성이 갖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제시된 이유는 혼인이 영원한 신적 신비의 가시적 표징이 되는 성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남편과 아내를 결합시키는 이 유비에 놀라움을 더하는 것이 있다. 티도 주름도 없는(에페 5,27 참조), 즉 추함도 늙음과 노쇠함도 없다는 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사랑이 ‘영원한 청춘’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랑을 영적인 아름다움의 표징으로 이해했다. 교회도 부부도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나누는 혼인적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적 사랑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사랑의 질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고, 아가페적 사랑이 그 정점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눈물과 상처 그리고 좌절을 체험할 것이고, 후회와 간절함에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통해 여물어진다. 즉 서로를 받아 내고 품는 과정을 통해 둘만의 새로운 시간들이 창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먼저 고찰한 후 사도 바오로가 말한 신랑 신부의 관계를 바라본다면 혼인의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이는 둘이 하나되기 전 원고독의 이중성(본성 그 자체로서 오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과 완전한 주체성, 상호주체성의 재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교리서는 말한다. 결국 혼인의 본질은 인간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신비가 그 원천이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혼인적 사랑으로 시간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신비가 그 중심이다.


이러한 여정을 사랑의 신학 용어로 설명하면, 에로스적 특성이 넘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에로스적 사랑의 특징은 자신에게 갇혀 있지 않다. 자신을 열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에 그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바라봄과 자신들의 체험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에게 발견되고 드러나야 할 신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