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번영의 뒷자리, 대탕녀 바빌론(묵시 17,1-6)

(가톨릭신문)

드디어 대탕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묵시록의 무대 위에 나타난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심판을 선고받는다. 처음부터 이 인물에게 허락된 존중은 없다. 그리스어 ‘포르네(πο?ρνη)’를 우리말 번역은 ‘탕녀’라 하여 방탕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본문이 고발하는 바는 더 노골적이다. 땅의 임금들과 몸을 섞은 여인(17,2), 그러니 차라리 ‘창녀’라 부르는 것이 정직하다. 


이 단어는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불편을 피하려 돌려 말하는 순간, 이 계시의 순수성과 급진성이 희석된다. 그녀는 그냥 창녀가 아니다. ‘큰’ 창녀다. 이 과장된 수식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 17장 5절에서 밝혀지는 그의 진짜 이름, ‘큰 바빌론’과 닿아 있고, 다시 예레미야서 51장 13절이 말하는 대바빌론의 패망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예레미야가 말하던, “큰 물 가에 살며 보화를 많이 가진 자”, 그 바빌론을 요한 묵시록은 ‘물 위에 앉은 창녀’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치며 심판의 대상을 분명히 한다. 예레미야의 바빌론은 요한 묵시록 시대에 로마로 은유되며 심판은 그러므로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제국이라는 체제를 향하고 있다.


그녀가 심판받는 이유는 불륜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륜은 육체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결탁의 비유다. 땅의 임금들은 바빌론, 즉 로마와의 동맹 속에서 경제적 평온함을 확보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 현실을 곳곳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묵시 2,9.13; 13,16?17 참조) 요한은 이 상황을 한 단어로 비유한다. ‘취기.’ 그는 말한다. 땅의 임금들이 창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취한다는 것은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오로지 성장과 돈의 감미로운 향에 취한 삶, 그것이야말로 예언자들이 경고하던 영적 실명이다.(이사 29,9; 호세 4,11?12 참조) 


구약의 예언자들은 정치·경제적 번영과 그에 수반한 우상숭배를 흔히 불륜과 창녀의 이미지로 그렸다.(이사 23,18; 1열왕 5,1?12; 아모 1,9; 요나 3,5?10; 에제 16,33?34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오래된 언어를 끌어와 18장(3.9?19)에서 경제적 번영을 곧 ‘불륜’과 ‘취기’라고 단언한다. 고대 창녀가 몸을 팔고 돈을 받았듯, 제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는 땅의 임금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준 셈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이미지는 낡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제 무역의 복잡한 외교와,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가난한 나라들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번영의 논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한다. 요한의 언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누리는 번영이 혹시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은 아니냐?” 이 질문을, 우리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면은 갑자기 광야로 이동한다. 광야는 시선의 전환을 위한 공간이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장소.(이사 21,10 참조) 이사야는 그곳에서 바빌론의 몰락을 보았고(이사 21,1?10 참조), 요한도 같은 자리에서 바빌론과 로마의 종말을 조망한다. 광야의 시선은 제국의 거대함을 상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바빌론과 로마는 든든히 서 있다. 


바빌론은 묵시록 쓰이던 시기 ‘로마’ 은유


종교·정치·경제적 결탁 현실 비판하며


오로지 성장과 물질에 취한 삶 경고


그러나 광야에 서면, 그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권력과 돈과 명예는 광야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과도한 무게를 실어 온 우리의 삶을 뚜렷이 보게 되는 자리. 광야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 광야는 단순히 거룩한 공간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진홍빛 짐승을 탄 여인을 본다. 머리 일곱, 뿔 열.(17,3) 12장 3절의 붉은 용과 동일한 형상이다. 광야는 하느님의 시선이 열리는 곳임과 동시에 악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요한 묵시록은 선과 악을 단순히 공간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통찰이 깊어질수록 악의 본질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창녀가 그 짐승을 타고 있다. 이는 곧 제국의 경제적 번영이 악의 시스템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번영 역시 하느님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번영이라는 이름의 신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릎 꿇어왔는가.


4절로 넘어가면 창녀의 외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 견고한 번영의 색깔인 자주와 진홍 그리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큰 창녀 바빌론. 그녀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불륜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화려함은 로마 제국의 무역 품목들과 정교하게 연결된다.(묵시 18,12?14 참조) 상업적 성공이 창녀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이런 비유에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왜 창녀의 짓인가?”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그 번영이 만들어낸 자리는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로마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모여 유행이 되는 곳.” 요한은 창녀를 “역겨운 것들의 어미”라고 부른다. 유행과 번영이 결합한 자리를 ‘어머니’라 이름 붙인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키기 위함이다.(예레 27,12 참조) 다시 말해, 세상이 탐하는 모든 화려함의 모태가 그 창녀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화려함 앞에서 박해를 받는다. 창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는 것이다.(6절) 그리스도인은 번영의 행렬에서 낙오한 이들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서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픔의 본질이다. 화려함의 앞줄에서 환호하는 대신, 뒤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론적 운명, 예수님의 운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그런 예수님을 미련하다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창녀의 후손인가.


나는 때때로 백화점에서 그 질문을 떠올린다. 명품매장 앞에 늘어선 줄, 그 긴장된 눈빛들.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이해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눈빛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단지 ‘좋은 삶’인가, 아니면 ‘옳은 삶’인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