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반트 고딕 양식의 성 마르티노 바실리카. 1341년부터 1467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수직선을 강조한 탑과 섬세한 창호, 부드럽게 흐르는 석조 리듬이 특징이다. 외벽의 곡선 부벽과 창틀의 비례는 장식보다 균형미를 중시한 브라반트 장인의 미적 감각을 드러낸다. 1946년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준 대성전으로 지정됐다.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각 나라의 국기와 수도를 잘 외웁니다. 삼색기가 워낙 많아 헷갈릴 법도 한데, 묘하게도 색과 모양만으로 구별해 냅니다. 머릿속이 복잡한 어른들과 달리 색과 형태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유럽의 삼색기는 모두 같은 듯 보이지만, 각기 다른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의 세로형 파랑·하양·빨강은 혁명의 이상을, 독일의 검정·빨강·노랑은 민족의 자유와 통일의 염원을 상징합니다. 오늘 소개할 나라인 벨기에의 검정·노랑·빨강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던 때, 독립군이 들었던 깃발의 색에서 유래했습니다.
1830년 여름, 브뤼셀에서 민중들은 지금의 벨기에 국가인 ‘브라반트인의 노래’를 부르며 브라반트 공국의 황금 사자 문장(紋章)에서 따온 색으로 된 삼색기를 흔들며 독립을 부르짖었습니다. 브라반트는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남부에 걸친 지역입니다. 브뤼셀을 중심으로 루벤과 메헬런 같은 상업 도시들이 중세 길드와 대학, 교회와 수도원으로 형성된 자치의 전통 위에서 북해의 중요한 허브로 발전했지요. 그 과정에서 가톨릭 신앙은 도시 공동체의 정체성이자 버팀목이 되었고, 그 신앙이 켜켜이 쌓인 대표적 도시가 할레입니다.
성 마르티노 바실리카의 종탑. 회백색 사암으로 만든 정사각 형태의 71m 높이 5층 탑이다. 꼭대기 층에는 54개의 종으로 구성된 카리용이 있다. 탑 안쪽 정문 위에 있는 성모상은 원래 성당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반트의 성모 성지 할레
브뤼셀 인근의 할레는 센강 상류의 마을로 강을 쉽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부터 여러 도로가 이곳을 지나쳤습니다. 7세기 몽스 수도원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면서 일찍이 성모 신심이 싹텄습니다만, 본격적인 성모 공경은 13세기 후반에 시작됩니다. 튀링겐의 성 엘리자베트가 브라반트 공작 딸에게 선물한 성모자상을 성당에 모시게 된 것을 계기로 할레는 성모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지요. 1335년 아비뇽에 모인 18명의 주교가 할레 순례자들에게 40일간의 대사를 부여하기로 합의할 만큼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1344년에는 순례자 사목을 돕기 위해 ‘성모 마리아 형제단’이 설립됩니다. 형제단의 기록부에는 이곳에서 성모님의 은총으로 일어난 59개 기적이 담겨 있습니다. 중세 초 형제단은 길드 중심으로 형성되어 성당이나 수도원 일을 돕거나 후원했는데요, 오늘날 본당에 있는 평신도 신심 단체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성모 마리아 형제단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형제단 중 하나로 지금까지 대축일에 성모자상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세례당의 공 모양 탑과 세례대. 구체는 1440년경 제작된 것으로 뒤편 장식벽 뒤 남쪽 통로 다락방을 지나 성당 밖으로 나간 뒤 들어갈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이를 몰라 사람들이 이곳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브라반트 고딕의 정형 성 마르티노 바실리카
브뤼셀을 벗어나면 이내 기차 창밖으로 좁은 하천이 흐르는 낮은 구릉이 펼쳐집니다. 붉은 기와지붕의 농가, 밭두렁을 따라 길게 늘어선 미루나무는 브라반트의 전형적인 풍경이지요.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곧 할레역입니다. 역에서 나와 센강을 건너 도심 쪽으로 걸어가면 큰 광장인 ‘그로트마르크트(Grote Markt)’가 나옵니다.
시청 맞은 편에 회백색 사암의 묵중한 종탑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납니다. 14·15세기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 마르티노 바실리카입니다. 종탑 옆에 공 모양의 슬레이트로 덮인 구조물은 세례 당의 탑 역할을 합니다. 브라반트 고딕 언어로 세례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의미를 표현하려 한 것 같습니다. 탑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외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로여서 실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구원하는 은신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남쪽 포털로 들어가겠습니다. 천상 모후의 관을 쓰는 성모님을 묘사한 팀파늄이 있는 문입니다. 성당 안의 공간은 높고 길게 뻗어 있지만, 양쪽은 어둡고 중앙 통로만이 밝게 빛나서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대 중앙으로 향하게 됩니다. 높이 솟은 기둥들이 팔각형 기둥머리를 지나 교차 아치 천장으로 이어지고, 교차점마다 장미와 잎 무늬, 성인상의 작은 부조가 있습니다. 브라반트의 석공들이 다듬은 돌을 통해 소박하지만 단단한 신앙의 미감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바실리카 주 제대와 할레의 검은 성모자상. 내진 기둥에 열두 사도 조각상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성모 마리아의 신비와 성경 속 장면들, 성 마르티노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다. 목각 성모자상은 높이 95cm, 폭 25cm의 크기로 원래 은도금 조각상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튀링겐의 성 엘리자베트가 브라반트 공작에게 선물했고, 훗날 공작 딸인 마틸다가 1267년 당시 성모 소성당에 봉헌하면서 순례가 시작됐다.
트라제그니 소성당의 성 마르티노 제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제단은 1533년 카를 5세 황제가 얀 모네에게 주문 제작한 것으로 일곱 성사가 메달 형식의 제대화로 묘사되어 있고, 그 위로 성 마르티노와 교부들, 복음사가들이 조각되어 있다.
신앙의 지킴이 ‘검은 성모자상’
성당 곳곳에 성모님의 상징인 ‘신비스러운 장미’가 보이지만, 주역은 주 제대의 ‘할레의 검은 마돈나’입니다.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님 모습인데요. 둘 다 왕관을 쓰고 있지만 모자간 친밀한 유대감이 물씬 드러납니다. 성모자상은 부분적으로 은으로 덮인 흔적이 보입니다. 그런데 왜 검게 됐을까?
할레는 1489년·1580년 두 번의 포위 공격을 받았는데, 전승에 따르면 기적적으로 성모님이 나타나 포탄을 옷으로 받아내면서 도시를 보호했다고 합니다. 그때 시커먼 포연에 휩싸였기에 검게 됐다는 거지요. 당시 멀쩡한 포탄 30발이 현재 성당 종탑 아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 향 연기와 산화로 표면이 그을어 검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신자들은 그 변화를 하느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죠. 이런 신심 덕분에 15세기 중엽에는 교황청에서 대사를 부여할 만큼 순례 열기가 높았습니다.
16세기 네덜란드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맞부딪힌 최전선이었습니다. 네덜란드 북부는 신교 지역이 되었고, 1566년의 성상 파괴로 플랑드르의 많은 도시에서 성상·제대·유리가 훼손되었습니다. 전에 소개한 스헤르펜회벨 성지는 그 재건의 상징이었죠. 이와 달리 남부 브라반트 지역은 가톨릭 신앙을 처음부터 지켜냈고, 할레의 성모자상도 공동체의 보호로 무사했습니다.
역사 서술은 몇 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의미의 층위는 깊습니다. ‘지켜냈다’라는 기억은 이후 공동체의 정체성이자 힘이 되었고, 대축일마다 할레의 광장은 전례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격변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을 지켜내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순례 팁>
※ 브뤼셀에서 할레까지 약 20㎞로 기차로 20분, 역에서 바실리카까지 도보로 10분. 브라반트 풍경을 즐기려면 버스 이용.(No. 170~ 172, HALLE Basiliekstraat 하차)
※ 성 마르티노 바실리카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10:00·18:00, 평일 08:00. 성당 옆 순례자 센터, 바실리카 지하 소성당에 박물관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