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14주일 -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 정순택 주교



오늘 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가장 마지막 장의 한 부분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막 돌아온 유다 민족에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배를 마치고 고국 땅에로의 귀환은 유다 민족에게 하느님의 승리로 이해되었지만, 막상 돌아와서 마주한 고국 땅의 실상은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성전은 무너져 있었고, 성도 예루살렘은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이사 66,12)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순히 이 세상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이 힘든 세상을 돌파해 가는 참된 열쇠임을 믿고, 그것을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14)라고 말합니다.

복음 말씀은 일흔두 제자를 선교 파견하시는 대목을 들려줍니다. ‘일흔둘’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 이후 그의 세 아들을 통해 불어난 노아의 자손들의 숫자인데, 이들을 통해 온 세상에 민족들이 갈라져 나갔다고 하여,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이입니다. 교회가 오늘 복음을 들려주는 까닭은, 우리도 복음 선포의 사도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지친 내 마음에 평화를 구하기 위해 성당에 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힘든 세상을 하느님의 평화로 가꾸기 위해 파견된 사도들입니다.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66,13) 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이사 66,14) 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용기를 길어내야 합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갈라 6,15)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세상의 외형적인 기준으로 참된 행복을 재단하지 않으며,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6,15)인 하느님 안에서 거듭 태어나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는 일꾼이 됩시다.



정순택 주교(서울대교구 보좌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