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73) 바쁘면 다 용서되는 건가요

(가톨릭평화신문)


K는 딸이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너무 바빠서 얼굴도 보기 힘들다고 한다. 게다가 어쩌다 전화라도 하면 날아오는 메시지가 “엄마, 왜? 나 바쁜 거 몰라~” 하면서 연락도 하지 말란다.

누군가 “속상하셨겠네요”라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아뇨.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하면서 오히려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딸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바쁨’으로 딸의 신경질적인 무례함이 용서되는가 보다.

누구는 “의사가 운동하라는데 도무지 운동할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랑하듯 말한다. 누구는 중요하게 챙겨야 할 것을 잊고 나서는 “아휴~ 요즘 바빠서 정신이 없어요!” 하면서 목소리 톤을 높여 말한다. 또 누구는 회의 시간에 늦게 와서는 “죄송합니다”가 아닌 “정말 몸이 두 개라도 안 되겠어요” 하는데 오히려 그 말투에 당당함까지 배어 있다.

주변 사람에게 짜증 내고 불평하면서 “내가 요즘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그래요” 하면서 이해해 달라고 한다. 바빠서 힘들고 고단하고 스트레스가 쌓여 신경질을 내는 것이니 양해해 달란다. 나 역시 마찬가지. 누군가에게 짜증을 내고는 “내가 요즘 상황이 그래…” 하면서 이해하라 한다. 그런데 나는 왜 바쁠까? 아니, 왜 바빠야만 할까? 운동 못 해서 아픈 것도, 중요한 것을 챙기지 못한 것도, 약속 시각에 늦는 것도 왜 다 ‘바쁨’으로 용서가 되어야 하는 걸까?

언젠가 한 지인이 “수녀님, 차 대접하고 싶어요. 오셔서 이야기 좀 해요”라고 하는데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 “네. 그곳에 갈 일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갈 일 있으면…” 뭐야. 이제 ‘일’이 있어야 사람도 만나는 거야 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한 적이 있다. 나는 진짜 차 한 잔 마시면서 사람을 만날 여유조차 없었던 걸까? 아니면 바쁘다는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바빠서 고달프다고 느낄 때, 분주해서 초조하고 불안할 때, 너무 일이 많아서 사람을 만나 차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없다고 느껴질 때, 바빠서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내고 불평을 할 때 어쩌면 나는 일로 무엇을 내세우려다 오히려 나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이 나의 존재감을 높여준다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멈춤과 쉼, 느긋함과 여유가 ‘나태함’이나 ‘게으름’이라는 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새 건물에 입주하고 나서 많은 하자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자질구레한 하자들을 거의 매일 발견하면서 마음이 다 망가져 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공사다망하시죠?”라는 우스갯소리로 인사말을 건네 왔다. 생각해보니 ‘공사다망’(公私多忙)에서 이 ‘망’(忙)이란 것이 마음(心)이 망(亡)했다는 뜻이 아닌가? 바쁘면 마음이 망가지나 보다. 하지만 사실 ‘바쁨’ 그 자체가 내 마음을 망가지게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내 마음 안에는 건축으로 인한 이런저런 불편한 감정들이 있다. 그 감정이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어서 더 분주하게 나를 몰아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바쁘면 잊으니까. 바쁘면 다른 것 안 봐도 되니까. 바쁘면 그냥 많은 것이 용서될 거 같으니까. 그래서 그냥 바쁘고 싶었는지도.

그래, 바쁘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망가져 바쁨으로 회피했던 그 마음을 돌볼 ‘멈춤’의 시간이 필요했다.



성찰하기

1. 짜증과 불안이 높아질 때 ‘멈춤’과 ‘쉼’의 시간을 ‘홀로’ 보내요. 그리고 바라봐요. 성당 안의 감실을, 혹은 정원의 꽃 한 송이를.

2. 바라보면서 눈을 편하게 쉬게 해줘요. ‘바라봄’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머무르게 해주니까요.

3. 불안은 ‘현재’에 온전히 머물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우리의 주님은 ‘현재’에 계시거든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 바쁘면 그냥 많은 것이 용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음이 망가져 바쁨으로 회피했던 것들을 돌볼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CNS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