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만 요구하는 복지에 탈북민 모자 굶어 죽어

(가톨릭평화신문)
▲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인근에 차려진 탈북 모자의 임시 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고개 숙인 채 묵념하고 있다.



‘신라면, 햇반, 된장국, 참치통조림, 삶은 달걀, 식혜, 젤리와 소시지…’

1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인근에 차려진 새터민 모자의 임시 분향소에 올려진 식료품이다. 분향소 옆 천막에는 “배고픔 피해 탈북했는데… 굶어 죽은 새터민 모자” “목숨 걸고 왔다가 아사가 웬 말이냐?”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새터민들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아사자’가 생겼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에게 토로했다.





탈북 모자에게는 너무 멀었던 복지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새터민 여성 한모(42)씨와 아들 김(6)군이 숨진 채 발견된 지 20일이 넘었다. 2009년 한국에 온 한씨는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를 출소한 후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9개월간 생계비를 지원받았다. 이듬해부터 소득이 생겨 수급자에서 탈락했다. 한씨가 목숨을 잃기 전까지 일정 소득은 확인되지 않지만, 집에 식료품이 거의 없었고, 월세도 몇 달 밀린 것으로 확인됐다.

새터민들은 하나원에서 적응 교육을 마치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돼 6개월간 1인당 50만 원의 생계비를 받는다. 이후 생계비 지원을 연장하려면 아파서 근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진단서나 한 부모 가정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중국 교포와 결혼한 상태로 한국에 들어온 한씨는 9개월간 생계비 지원을 받았다. 남편이 일하면서 생계비가 끊겼다. 한씨 가족은 중국으로 이사했지만, 한씨는 지난해 말 아들과 돌아왔다. 남편과는 이혼했다. 장애아들을 홀로 키우며 일 할 수 없었던 한씨는 기초생활보장 수급 신청을 위해 주민센터를 찾았지만, 담당자는 이혼 확인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오산에서 8개월 된 아기와 사는 박모(32)씨는 “이 뉴스를 접하고 내가 같은 처지였어도 이렇게 됐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박씨는 중국에서 만난 남편과 사별한 후 지난해 10월 탈북했다. 박씨는 정부에서 매달 110만 원의 생계비를 받는다.

박씨는 “수급자에서 한번 탈락하면 다시 생계비를 받는 게 정말 어렵다”면서 “임신을 하든가, 완전히 다쳐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서류로 증명해야 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더군다나 한씨처럼 아이가 장애가 있으면 일을 하러 갈 수도 없고, 이혼 서류를 중국에서 떼오는 것도 불가능해 생계비 연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자의 아사 소식에 분향소로 달려온 새터민 이아무개(48)씨도 “3000만 리를 넘어 살자고 왔는데 굶어 죽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며칠 동안 울음만 나왔다고 털어놨다. 2011년에 탈북해 7살 된 아이를 홀로 키우는 이모씨는 “몇 달째 집세도 못 내고, 전기요금이 밀리고, 단수됐으면 주민센터 담당자들이 문을 열고서라도 들어갔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제2의 한씨가 안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북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냉대하는 게 여전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교회의 새터민 사목, 인격적 만남 지향해야

11일 서울대교구 중앙동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우리 사회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에 관해 관심이 없다는 걸 느꼈다”고 한탄했다. 염 추기경은 북방 선교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한 옹기 장학금 전달식에서 “우리에게 온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핵심 중 하나는 환대의 정신이다. 새터민들이 남한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잘 적응하려면 이들을 향한 열린 마음과 환대의 정신이 필요하다. 새터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교회는 교구별 민족화해위원회를 통해 새터민 사목에 힘쓰고 있다. 새터민 자녀를 위한 그룹홈을 운영하고, 새터민을 대상으로 세례식을 거행하는 등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며 삶과 신앙에 동행한다. 인천교구는 남동겨레하나센터를 통해 상담과 교육을 돕고, 탈북 어르신 쉼터 등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새터민 담당 사목자들은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닿지 않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보완하려면 개인적이고 친밀한, 인격적 만남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에서 아기를 출산한 새터민 여성 박모씨는 “북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으면 죄인 취급을 받기 때문에 종교단체의 지원은 기대도 안 하고 생각도 못 한다”고 말했다.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강주석 신부는 “교회가 새터민을 만날 때 신자 수를 늘린다든가, 세속적인 영역의 확대로 접근하면 새터민들은 공격적인 선교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강 신부는 “새터민들을 선교를 통해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