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78)‘나는 너와 달라’ 구별 짓기의 허영

(가톨릭평화신문)
▲ 어느 순간 ''나는 너와 달라''하고 상대방을 구별하고 선을 긋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CNS 자료사진



나의 가까운 친척 중에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가 있다. 이름 석 자만 대도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배우다. 어릴 적 명절이나 방학 때면 종갓집인 그의 집에 놀러 가 지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지더니 그의 가족조차도 친척들과의 교류가 끊어졌다. 그의 결혼식에는 한류스타들이 대거 참석하였지만, 친척들은 제외되었다. 친척 어른들은 배신감에 흥분했지만, 그와 우리는 이미 ‘혈연’이 아닌 ‘자본’으로 서로의 신분이 구별 지어진 것 같았다.

사회학자 피에르 브르디외의 말이 맞는 걸까. 자본이란 것이 서로를 구별 짓는 행동양식이나 취향으로 드러나면서 취향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분리하기 위한 불편한 상징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취향은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구별 짓는다는 것 말이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하나도 안 달라져. 나아지기는커녕 절망만 더 커져.” 어느 드라마 주인공의 한탄이다. 게다가 입은 것, 걸친 것이 안목이고 실력이기에 가난한 자의 안목은 후질 수밖에 없다며 가난한 이를 대놓고 무시한다. 세상은 그가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아왔는지보다 어떤 취향으로 살아왔는지를 묻는다. 어떤 자동차를 타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서 어떤 집에서 사느냐는 것, 그것이 곧 그 사람의 능력이고 신분이라는 거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서로를 구별 짓게 하는 취향은 계급’이라는 무서운 말을 했나 보다.

언젠가 내가 오랫동안 공들여온 프로그램에 대하여 후배들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있었다. 순간 내 깊은 곳에서 “뭐요? 당신들이 뭘 안다고”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그러면서 “당신들의 취향은 나의 것과는 차원이 달라” 하는 허영심이 스멀스멀 내 눈빛과 목구멍을 타고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 그들을 내 아래로 밀쳐내면서 나와 분리하려 했다. 구별 짓기를 한 것이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나는 너와 달라’ ‘나는 옳고 너는 틀려’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어’ 하면서 상대와 구별하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지식은 천박한 자본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자본은 사고 파는 상품인지라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 결코 ‘나’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닌 것을 내세워 누군가를 내 아래로 밀쳐내려 했다는 것,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우리는 ‘구별 짓기’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있음과 없음의 차이로 끊임없이 서로를 분리하고 차별하는 세상에서 수도자인 나 또한 그 틀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강남에 산다 하면 있어 보이고 서울대 나왔다 하면 똑똑해 보이고 일용직이라고 하면 불쌍하게 바라볼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아도 자동시스템처럼 있고 없고의 차이를 구별하려 들 것이다.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내게 없는 것, 내게 있어도 내 것이 아닌 것, 내게 있어 내 것일지라도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을 자랑하는 것, 취향이라고 믿고 싶은 그것, 허영일지도.



성찰하기

1. 나는 언제 사람들로부터 나와 분리하기 위해 ‘구별 짓기’를 시도하나요?

2.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 누군가를 아래로 바라본 순간, 나의 것은 사고 파는 싸구려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3. 당신과 나를 구별 지으려는 취향, 허영 아닐까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